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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8.14. 주일오전 -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에베소서 30)


20160814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5장 3절-7절




  1. 서론 : 우리는 우리 다워야 한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송강 정철의 직계 장손인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원래 전라도 담양 분이신데, 대학에 가기 위해서 서울에 가셨다가 거기서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예수를 믿고 또 목사가 되었으니 이 분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집안은 정말 부유한데, 집안의 후원이 완전히 끊어져서 며칠씩 굶은 것은 다반사고, 버스비가 없어 몇 시간씩 걸어서 교회를 가기도 했고, 심지어는 볼펜을 살 돈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분을 안 지가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는데요. 이 분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제가 참 이분에게 감탄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얼마나 점잖고 얼마나 예의가 바른지 꼭 조선시대의 선비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투나 말의 속도, 그 어조까지 참 부드럽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송강 정철의 후손이라고해서 그 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역시 가풍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 보다, 정말 정철의 후손같아 보인다고 말입니다. 


집안에는 집안마다 ‘가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가풍은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또 그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이렇게 함께 살면서 몸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한 집안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하고, 또 식구들의 행동거지들이 비슷해져 가는 것은 단순히 유전자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 ‘가풍’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풍이 한 집안 사람들을 모두 닮아가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집안 사람 다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나의 가족이고 형제와 자매들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혈통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모두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혈통이 주는 것보다 더 강하고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공통점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부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하나님을 모델 삼고, 예수님을 모델 삼아 우리를 하나님의 집안 사람들 답게 빚어가고 다듬어 가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움’이라는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옆 집 아이에게 나를 닮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뒷 집 아이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죠? 내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닮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 말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나를 닮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 자녀입니다. 그 음성은 자녀만이 들을 수 있고 또 자녀들에게만 들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그 은혜로운 말씀에 우리의 삶을 내어 드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아버지를 닮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은 3절부터 7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다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두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우리의 삶의 기준과 우리의 말, 그러니까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달라지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기준이 달라질 때, 우리는 우리다워진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준을 ‘다르게’ 바꾸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가 때로 어떤 사람에게 저절로 “야, 그건 정말 너 다운 행동이다!”고 말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말하게 되지요?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람에게만 있는 독특한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게 될 때, 그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그 사람다운 행동은 그 사람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동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그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시켜 주는 가장 뚜렷한 차이가 되기도 합니다. 성도들에게 성도답게 살아가는 삶이 꼭 그런 역할을 합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는 것은 성도들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성도를 성도가 아닌 사람들과 구별시켜 주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는 자기 다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들은 성도니까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니까 성도가 아닌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고, 그 다름을 통해 너희 자신을 너희답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여기서 ‘음행’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모든 행동을 말합니다. 특히 결혼관계를 벗어난 남녀 간의 관계를 뜻합니다. ‘더러운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행동들을 말하고, ‘탐욕’은 남의 것을 탐내거나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죄악들은 다 놓아두고 특별히 이 세 가지를 지적하며 금지했던 것은 이런 것들이 다른 죄악들보다 특별히 더 나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로마 시민들이 이 세 가지를 너무도 당연한 것, 상식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음행하는 것, 우상을 숭배하거나 그것과 연관된 행동을 것, 그리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식이었고 일상생활의 일부였습니다. 그렇게 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요.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 중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이 다 그렇게 하고 살아도, 세상이 다 그런 것들을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따라 살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이 굉장히 엄하고 단호합니다. “하지 말라”, “피하라” 정도가 아니라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란 말입니다. 이야기인 즉 자기가 가진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불가능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그 말의 뜻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말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도들에게 성적인 부도덕, 우상숭배, 그리고 욕심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단어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전을 뒤져도 나오지 않고, 그래서 그 뜻도 모르는 말이 될 정도로 이 세 가지가 성도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이 말을 듣고 너무 과하다는 둥, 정말 너무한다는 둥, 이런 사회에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냐는 둥 볼멘 소리를 늘어놓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잘라 말합니다.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무슨 뜻입니까?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성도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성도가 아닌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다워질 수 있고, 자녀다운 모습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과 상식을 따라서 살면 세상과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로 바꾸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세상의 기준을 새롭게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사는 일도 힘든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기준입니다. 성도들은 땅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1. 말이 달라질 때, 우리는 우리다워진다. 


기준이 달라지게 하시고 그래서 삶이 달라지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다워지게 하는 하나님의 첫번째 방법이라면, 두번째 방법은 우리의 ‘말’을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인격과 가치관의 표현입니다. 그 사람이 거짓말이나 위선적인 말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그대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 바뀌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바뀌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말에는 말을 하는 사람을 바꾸는 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바꾸면, 그 사람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존대말을 사용하게 했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했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학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 났답니다. 욕설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싸움이 줄고 학교폭력이 거의 사라졌답니다.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존대말 하면서 화를 내거나 싸우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말투 정도가 아니라 아얘 말의 주제가 바뀌고 그 방향이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말이 사람을 바꾸는 일은 훨씬 더 강력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말을 만드신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그걸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을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누추함’은 누추한 말을 가리키는데 점잖은 사람들이 들으면 얼굴이 벌개지는 말을 뜻하고, ‘어리석은 말’은 들어서 아무런 유익도 없는 내용이 없는 말, 그리고 ‘희롱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드는 말을 말합니다. 사실 이런 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나누었던 일상적인 대화의 종류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음행과 우상숭배, 그리고 탐욕이 그런 것처럼 그런 말들은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성도는 그런 말들을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런 말들은 다 무언가를 세우는 말들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도 그랬었지만 실은 우리들 또한 이런 말들에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을 다 빼고 대화를 나누라고 하면 무슨 말을, 무슨 재미로 할지 고민스러워 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 말들은 결코 건설적인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우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아주 잠깐 건강하지 못한 웃음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그 대신 그런 말을 하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허물고 생각을 무너뜨립니다. 결국에는 관계를 깨뜨리고 세상을 거칠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가만히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요. 사람들의 대화의 상당부분은 두 가지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은근히 그렇게 하느냐,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느냐만 다를 뿐인데요. 하나는 자기 자랑이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흉보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참 이상하지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 자체가 항상 자기 만족에 목마른 교만한 존재이니까요. 그래서 말이 나를 향하면 그것은 나의 자랑이 되고, 다른 사람을 향하면 다른 사람들을 흉보고 비난하는 말이 되기가 그렇게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말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는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감사의 말을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하는 말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의 은혜로움과 풍성함에 대한 우리 기쁨과 만족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고 흘러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이런 언어가 되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말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우리가 얻고 누린 은혜를 전달해 줍니다. 그래서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세우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세웁니다.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세웁니다. 우리를 우리 자리에 든든하게 세우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워 드립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저 그들이 당연하게 또 익숙하게 말하는 말투나 말의 내용을 따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삶의 기준 뿐만 아니라 말의 기준도 다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답게 해 주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부끄러운 말들이나 내용 없는 빈 말들, 그리고 남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말들을 제거하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언어를 심어 놓으십니다. 그 감사의 언어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고 달라지게 만드는 열매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주의 !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의를 한 가지 주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그것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희는 달라야 한다, 그 다름이 바로 너희다움이다. 내 자녀는 나를 닮아야지 세상을 닮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이 세상은 우리에게 정반대로 말합니다. 뭐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적당하게, 그저 상식적으로, 우리들과 많이 다르지 않게 사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너희가 그렇게 다르게 살아가려고 하니까 세상도 너희를 싫어하고 너희도 불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런 말들이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솔직히 가끔씩은 저도 헤깔릴만큼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요즘에는 교회 안에 이렇게 생각하시고 이 기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런 말들은 모두 ‘속임수’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닮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기 자녀를 만들려는 세상의 속임수 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속임수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이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우리가 속임수에 넘어가면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자와 함께 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속이는 자와 함께 하는 자가 되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운명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가볍고 허무한 인생,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인생이 되고 맙니다. 


5. 자녀들아, 아버지를 닮은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희의 삶의 기준을 바꾸고 너희 입의 말을 바꿔서 성도다운 성도가 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영광스럽게 물려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또 하나님 나라를 물려줄 생각이 없으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잊으시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고 하나님처럼 말하며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한 주를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가실 때, 열심히 나의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가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의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을 닮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담긴 그런 말이 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새롭게 선물받은 이 한 주간이 더 많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날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2. 우리 입술에서 모든 좋지 않은 말들을 제거하게 하시고 감사의 말들이 담기게 하소서.
  3. 이번 한 주간도 삶의 구석 구석에서 우리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