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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8.17.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누가복음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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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8월 17일 수요일



 


비교적 옳고 그름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들이 특별히 힘들어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기준이 뚜렷하면 어떤 일을 보거나 혹은 어떤 사람을 볼 때, 항상 그 기준을 사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기준을 흐릿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흐릿한 기준을 자신에게도 사용하게 되어서 옳지 않은 일을 더 쉽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참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납해야 한다는 분명한 명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의 많은 사람들도 이런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납하고 사랑하는 일은 아얘 포기하고 그저 율법과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이 만들어낸 기준들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중에서 이렇게 하는 것을 옳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살펴보면 더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모습을 꼭 해결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은 분명히 분별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제단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18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 관리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일 뿐 아니라 율법을 정말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볼 때, 흠 잡을 데 없이 경건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 앞에서 스스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19장에도 부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게오였습니다. 이 사람은 부자이기는 했지만 18장의 부자관원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삭게오는 유대인이면서도 로마의 세금관리로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삭게오가 가장 더러운 죄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삭게오는 영생에 대한 질문처럼 거창한 질문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키가 작은 삭게오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을 때, 사람들은 삭게오를 얼마나 업신여겼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삭게오를 만났고 삭게오의 속 마음을 읽으시고는 삭게오가 초청하기도 전에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삭게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 들였지요. 


이 일 때문에 삭게오는 물론이고 예수님마저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의 집에 머물려고 들어갔다고 말입니다. 삭게오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기도 전에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놓을 것이고, 그 동안 불법적으로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아무 흠도 없고 비난할 꺼리도 없었던 부자 관원은 구원의 문 앞에서 스스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흠많고 비난받았던 부자 삭게오는 그렇게 구원의 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모든 상식을 뒤집어 버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람들의 예측을 뒤집는 이런 일들이 벌이지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것은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순전히 은혜로 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사람들과 우리 주님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죄인이면서 자꾸 무언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훌륭하다, 존경할만하다는 라벨을 붙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다, 형편 없다, 자격이 없다는 꼬리표를 붙이지요.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보십니다. 그 분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십니다.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갖출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께로 오기만 하면 영접하시고 또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그 기준대로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준이 아무리 분명하고 아무리 그 기준을 잘 지킨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만족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로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를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제단하는 일을 피할 수가 있고, 나아가 그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가 교만한 것은 예수님이 왜 오셨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를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결코 교만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용납하고 사랑하는 일은 겸손한 자들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언제나 이 은혜 앞에서 겸손하며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