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9.02. 금요기도회 - 사람이 무엇이기에(시편 8편)

20160902FE.mp3.zip






설교일 : 2016년 9월 2일 금요일

설교분문 :시편 8편




[도입]


아마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한 번 쯤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대학 때 교회에서 수련회를 갔다가 거기서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한 후에 기도시간이었는데 정말 그 예배실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가득 채워진 것 같았습니다. 이 것도 저에게는 참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일은 예배가 끝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그저 평범하던 나무 하나, 돌맹이 하나가 너무도 특별하게 보였고, 그랬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환하게 웃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저는 멀리 서 있는 나무에게로 다가가서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 말로 천하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는 듯한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감정적으로 흥분되어서 겪게 되는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는 무감각해져 있고 잠들어 있던 우리 영혼을 민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인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일 것입니다. 성도에게 이런 경험은 참 귀하고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영혼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8편에서 다윗도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래서 그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고난을 통과한 후에 그런 경험을 했고 바로 그 은혜와 감격을 시편 8편으로 옮겨 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어떤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찬양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시편 8편을 함께 살피면서 다윗을 그토록 감격적으로 찬양하게 만든 이유를 찾아보고 그것이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환란은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게 해 준다


다윗이 환란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첫번째 이유는 그가 자신의 환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했고, 또 놀랍게도 자신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승리의 도구가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말 대로입니다. 성도들이 세상 앞에 설 때, 성도들은 정말 한 없이 작아집니다. 세상이 골리앗이라면 자신은 그 앞에선 다윗처럼 여겨지고, 세상이 어른이라면 자신은 그런 세상과 싸우려고 드는 젖먹이 어린아이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이야기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무 힘 없는 넋두리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지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느낌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 세상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그저 젖먹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어린 아이의 옹알이에 불과하고 우리의 기도 또한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세상을 이런 모습으로 내버려 두실까요? 왜 이렇게 앞뒤기 바뀌고 위 아래가 거꾸로 된 것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까요? 종종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는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일일수록 더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악한 세상을 크게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앞에서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들어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목적과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시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힘들 때는 기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데, 생각도 엉망이고 마음도 엉클어져 있고, 몸까지 너무 지쳐서 기도가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저 억지로 억지로 주님만 부릅니다.  무슨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같지 않은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정말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정말 나의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며, 그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 어려움이 악한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을 때, 그런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악한 자들의 그 힘있고 높은 목소리를 낮추시고 잠잠하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볼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란과 고통을 우리의 기도와 만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갖난 아기같고, 우리의 기도가 갖난 아기의 웅얼거림처럼 연약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살갑고 친절한 은혜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웅얼거림을 악한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하나님의 호통으로 사용하십니다. 


2. 환란은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깨달게 해 준다.


두번째로 다윗은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진짜 깊이와 크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흔히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고난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런데, 고난이 사람을 겸손하게 낮춘다는 말은 원래는 높고 귀한 사람, 겸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낮은 자리로 끌어 내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이 사람을 원래 사람의 자리로 되돌아 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원래 사람은 교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흙이 없으면 몸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숨결이 없으면 그저 영혼 없는 짐승에 불과한 피조물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높아집니다. 높아지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자꾸 자기 자리를 떠나려고 하고 또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높은 자리로 올라갑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큰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제서야 다시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부질 없는 존재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되고, 원래의 자기 크기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제 크기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 세상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어느날 밤 다윗은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하늘은 예전의 하늘 그대로였고, 그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들 또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윗에게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바늘들이 부풀려진 거품들을 모두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작은 다윗, 보잘 것 없고 미미한 다윗, 있는 그대로의 다윗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늘 앞에선 다윗은 자신이 먼지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은 한 번 더 작아졌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작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 하늘과 하늘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읖조립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참 덧 없고 미미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정말 별 것 아닌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만을 생각해 오셨고, 또 빈틈 없이 완벽하게 돌보셨습니다. 그렇게 크고 크신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시고 또 돌봐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울었고, 또 그 은혜를 노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작음을 알고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될 때,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와 깊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진짜 크기를 아는 것은 그런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작고 자격없는 나에게 주어졌는지를 알 때이기 때문입니다. 


3. 고난은 우리 자신의 참된 존귀함을 되찾게 한다.


이제 고난을 통과한 다윗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사람의 본질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가치없고 나약한 피조물이니까요. 그게 저와 여러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최고로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자리로 높이셨습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세상 만물을 그 발아래 두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왕의 자리를 나눠 주신 것입니다. 가치 없고 연약한 피조물에게는 가당치 않은 은혜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영광과 은혜를 주셨고, 다윗은 고난을 통과한 후에 작은 피조물의 낮은 자리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제대로 노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존귀함은 교만함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존귀함이 교만함과 함께 하게 되면 그 존귀함은 천박함이 됩니다. 그래서 존귀함이 참된 존귀함으로 남아 있으려면 교만함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존귀해 지면 교만해 집니다. 교만이라는 원죄를 지닌 죄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고 나서 자신의 낮음을 정말로 깨달고 받아들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존귀함이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덧붙여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귀함이 계속 존귀하게 남아있으려면 우리는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고난을 통과하고 나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존귀함은 천박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진짜 존귀함이 될 수 있고, 사람들과 세상을 아름답게 섬기는 그런 존귀함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큰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큽니다. 그 은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진짜로 큰 것은 그 은혜를 받는 우리가 너무나 작고 미미한, 가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은혜가 그렇게 작고 미미한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는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나의 크기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잘 모릅니다. 오늘 저도 그렇지만 성도들에게서 감사와 감격이 많이 사라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아를 부축이고 부풀리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도 그들처럼 풍선처럼 부풀려진 자아를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리게 되었으니까요.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한 많은 이유가 있지만,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고난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고난은 부풀려진 자아에서 바람을 빼 줍니다. 우리의 원래 크기를 되찾아 줍니다. 우리가 본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을 은혜를 알고, 감사와 감격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난이 주는 겸손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귀함을 참된 존귀함,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람들의 귀히 여김을 받는 진짜 존귀함이 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인생이 없고, 이유 없는 고난도 없습니다. 고난은 가시상자에 포장되어 배달되는 값진 선물입니다. 고난은 아픕니다. 쓰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할 때, 우리는 그 덕분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앓고 있는 영적인 질병들을 치료받게 될 것이고, 우리는 또 다시 우리 자신의 존귀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그 고난을 통해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끊임 없어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