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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9.09. 금요기도회 -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시편 9편 1)



설교일 : 2016년 9월 9일 금요일

설교분문 : 시편 9편 1-12절



[도입] 


오늘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라는 말로 시편 9편을 시작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여러분이 보시기에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다윗의 감정이 어떤 것 같습니까? 굉장히 흥분되어 있고,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하겠다는 결의가 엿보이지요?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같은 단어들이 그런 다윗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지금 늘상 그래왔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개 이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지려면 우리가 경험한 은혜가 그만큼 놀랍고 크거나 아니면 그렇게 할만큼 좋은 상황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이 나를 저절로 그렇게 하도록 몰아갈 때 우리 속에서 그런 찬양에 대한 소원이 생기게 되니까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다윗은 전혀 그렇게 뜨거운 찬양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솟아오를 수 있는 상황 이 아닙니다. 13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라고 말입니다. 다윗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사망의 문’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찬양을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고 또 찬양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런 종류의 찬양이 있는가? 나는 그런 힘든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을 정말 그렇게 찬양해 보았는가? 지금 나는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니 몇 번은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가, 또 ‘자주’ 그랬는가 생각해 보니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대개는 그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을 높일만한 상황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을 찬양했고, 또 그럴만한 일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자랑하고 칭찬했지요. 그래서 말씀 앞에 참 많이 부끄러웠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서 그런 찬양의 비결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 노래를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함께 부르고 싶어서 지었을테니까요.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다윗의 찬양을 주셔서 이 찬양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부르는 찬양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시다


다윗은 지금 굉장히 어려운 형편에 있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할만큼 급박하고 위급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다윗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 원수들은 물러갈 것이다. 둘째, 그 때 원수들은 넘어져 망할 것이다. 전혀 그럴 조짐이 보이질 않는데도 다윗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정말 믿음 한 번 대단하지요? 그렇다면 다윗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억울하게 이유없이 힘든 일을 당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는 기도를 ‘고소장’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절대로 이 고소장을 기각하지 않으시고 재판을 시작하십니다. 사람인 재판관은 오판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풀어주고 피해자를 더 억울하게 하고, 죄 없는 사람에게 형을 선고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조사과정이나 재판이 진행되어 질 때, 편법이나 불법들이 끼어들 때가 있지요. 그래서 사실 우리는 법을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면서도 법과 법의 판단을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법적으로 해결할 일이 생기면 많이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재판관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고소장을 받으시기 전에 모든 상황을 100퍼센트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판단을 내리실 때에도 전혀 치우침이 없고 오판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100퍼센트 완전히 의로운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믿고 아뢰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다윗은 기도로 자신의 대적들을 고소했기 때문에,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미 재판을 끝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뭐만 남은 것이죠? 형을 집행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있게 말한 겁니다. 대적들은 물러갈 것이고 그 때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는 비록 고통과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뢰고 있지만 불안과 의심이 아니라 그런 확신 가운데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의로운 하나님으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기도했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주시고 대적들을 혼내주실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 확신의 근거를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만 찾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경험은 주관적일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윗은 이 세상의 역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 보인 이 세상의 역사는 단순히 힘 있는 나라는 흥하고 힘 없는 나라는 망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들을 벌 주셨던 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출애굽 때 애굽이 당한 일,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의 멸절….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넉넉하게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개인의 경험으로도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항상 잘 살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움직여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겉으로 보면 그야 말로 힘이 전부인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악한 자가 선한 자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그런 세상의 모습이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정말로 그것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라면 과연 이 세상이 이렇게 남아 있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미 망해도 여러 번 망했고, 그렇지 않다면 생지옥으로 변해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 세상은 망하지 않고 그래도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을까요?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간 중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넘어가는 악한 나라나 혹은 악한 사람들을 재판하시고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만 그렇게 움직여 가시고 우리 인생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 가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나 언제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운 재판관이시고 의롭게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왕이시니까요.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실 뿐 아니라 이 세상과 개인의 삶을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의롭게 판단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적들을 벌 주시고 자신을 구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져서 그렇게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상황은 전혀 변한 것이 없어도 말이죠.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관이시라는 것. 이것이 다윗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쁘고 힘차게 찬양할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인데요. 우리도 이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입술에서도 다윗의 찬양을 닮은 노래가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압제를 당하는 자의 피난처이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 편인 것은 힘이 세면 셀 수록 좋고, 내 편이 아닌 것은 그렇지 않을 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힘 센 분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만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고, 또 하나님만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테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억울하게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시요 환난 때의 요새시로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평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으시고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말인데요. 그런데, 성경은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편을 들어주시고, 약하고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런 말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해를 많이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한 분이라고 말이지요. 물론 이 말만 생각하면 그런 오해가 오해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일그러져 있다는 뜻도 됩니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피해자가 되고 누군가가 가해자가 될 때, 거의 항상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의인이 피해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한 자의 하나님이 되시고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주시며, 의인의 산성과 요새가 되어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의로운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억울하게 고통과 핍박을 받는 다윗과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능력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산성과 요새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고 즐겁게 찬양했던 두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대책이 없는 사람, 힘 없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운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가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복됩니다.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상처를 입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때로 가난해도, 또 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편을 들어주시고 요새와 산성이 되어 주시니까요.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항상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희도 약자가 아니라 힘있는 자가 되고, 상처입는 자가 되지 말고 상처 주는 자가 되라고, 을이 되지 말고 갑이 되라고 말이지요. 악한 세상, 악한 사람들이 힘을 쓰는 세상에서 살다보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몇 차례 고통을 당해 보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 유혹에 넘어가서 그 알량한 힘을 가지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어렵고 아프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복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관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들의 요새가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문 앞에서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함께 다윗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지존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찬양을 받기에 충분히 합당하신 의로운 재판관이시며 환란 때의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입술에서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떠나지 않고 그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떠나지 않는 주님의 이름을 아는 성도들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