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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12.11. 주일오전 - 하나님의 전신갑주 - 구원의 투구(에베소서 46)


20161211SM.mp3.zip





날짜 : 2016년 12월 11일 일요일 

본문 : 에베소서 6장 13-17절




  1. 도입 :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다


우리 몸에는 ‘아킬레스 건’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발뒤꿈치 뒤쪽에 있는 힘줄이 아킬레스 건인데요. 이 부분이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킬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적의 몸을 가진 용사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인 테티스가 이 세상과 지옥 사이를 흐르는 스틱스라는 강물에 그의 몸을 담가 몸 전체가 세상 그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는 갑옷처럼 단단해 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킬레스는 우리가 잘 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해서 승리를 거두지만, 결국에는 파리스라는 사람이 쏜 화살에 발목을 맞고 목숨을 잃게 됩니다. 무적의 몸을 가진 그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머니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발목을 잡고 강물에 담그는 바람에 한 쪽 발목이 강물에 젖지 않았고, 거기는 그냥 사람의 발목과 같은 상태로 남이 있었는데, 파리스가 쏜 화살이 그 곳을 관통하면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이 발목 뒤의 힘줄을 아킬레스 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동시에 아킬레스 건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야기할 때도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무적의 몸을 가지고 있었던 아킬레스도 자신의 발목 한 부분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영적으로 특별히 취약한 부분이나 소홀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분명히 바로 그 곳이 우리의 아킬레스 건이 될 것이고, 사탄은 분명히 그 곳을 공격해서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전신갑주를 주시면서 각 부분 부분을 말씀하시고, 각 부분을 보호할 특별한 보호구들과 무기들을 모두 지정해 주신 것은, 우리의 영적인 아킬레스 건을 없애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 투구를 꼭 써야 한다


방패까지 모두 이야기 했으니까 전신갑주에 대한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고, 이제는  공격 무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지만,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보호장구를 더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투구’입니다. 아시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보호장구인데요. 머리는 사실 그것 자체가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다른 곳이 아무런 문제없이 멀쩡하다고 해도 머리를 얻어 맞아 정신을 잃거나 큰 충격을 받아 머리를 다치면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기 때문에도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머리는 그 어떤 부분보다도 철저하게 보호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위해 특별한 모양으로 그리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이 투구였습니다. 시대가 변했고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과는 달리 요즘 군복은 모두 천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나도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전쟁에 나갑니다. 그렇지만 전쟁이나 훈련에 나갈 때 바꿔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군모입니다. 평상시에는 병사들이 천으로 된 모자를 씁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나면 철모로 바꿔 씁니다. 그리고 이 철모는 총알을 맞아도 뚫리지 않는 재료로 만들고, 정면으로 맞지 않으면 총알을 튕겨낼 수 있는 그런 구조로 특별하게 만듭니다. 머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III. 구원의 소망의 투구

영적인 싸움을 싸울 때도 투구는 필요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도 머리는 똑같이 중요하고 그래서 그만큼 신경써서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투구를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나눠드린 그림의 투구 부분, 맨 윗줄에 ‘구원의 투구’ 이렇게 써 넣으시구요.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원의 투구” 네. 투구는 무엇이죠? 네.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를 보호하라고 투구로 주신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가 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오늘은 그 의미를 성경을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하려면 성경 몇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 하나 찾아보고 그런 다음 하나로 묶어 보겠습니다. 원래 구원의 투구라는 말은 에베소서에 처음 나온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말을 가져 온 곳은 이사야서 59장 17절 말씀인데요. 거기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실 그 구원을 기대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었던 어려움은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 때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징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들을 그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데, 그 상황 자체가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른 결과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하며 탄식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서 59장 17절 말씀,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 응답으로 주셨습니다. 


구원의 투구라는 말이 나오는 또 다른 곳은 신약성경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한 번 더 말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거기서는 ‘구원의 투구’가 아니라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똑같은 것에 대해서 한 말이니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울이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한 말을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를 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뜻이 더 정확해 질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 구원은 여전히 완성 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될 때, 구원은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를 보면 더욱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누룩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일 뿐, 이 세상은 여전히 사람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의 나라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따라 살아갈 때, 그 길을 떠나 세상의 길을 따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고 또 그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 결국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아직은 우리의 미래의 ‘소망’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저 희망하고 있는 것,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일에 대해서 사용합니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나 ‘희망사항’ 정도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원래 소망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 꼭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오는 소망이라는 말은 가리키는 대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의 소망은 막연한 어떤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니까 믿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그러니까 틀림없는 사실이고 또 이치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저 ‘있으라’는 말씀 한 마디에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또 움직여 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됩니다. 우리의 말은 전혀 그런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곧 현실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히 내가 꼭 그렇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 자체가 이미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는 우리의 소망은 보장도 없고 근거도 없는 애매한 것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소망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아니 1000퍼센트 완전하게 보장된 확실한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꽉꽉 잘 믿는다고 해도 그렇게 믿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니면 그것은 그저 근거 없고 보장 없는 희망사항을 믿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가 믿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때로 우리의 믿음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그 약속은 우리의 삶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약속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곧 현실과 똑같은, 부도가 날 수 없는 보증수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는 풍토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그말씀을 붙들고 믿는 신앙의 가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것 보다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믿는다는 느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도 그랬던 것같습니다. 부끄럽게도 목사가 되어서도 상당기간 동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그저 믿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때부터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믿음이 능력이 되었습니다. 제가 믿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저를 붙들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 그 말씀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 달라고 권면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히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위한 실제적인 능력이 되고 그래서 말씀이 여러분을 확신있게하고 항상 기쁘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 믿음은 우리 삶의 능력과 확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믿음을 막연한 것으로 내버려 두고,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내용 없는 것으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의 믿음을 그런 하나님의 약속으로 채워 가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현실적인 능력이 되도록 그렇게 만드기시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그렇게 여러분에게 생생하고 강력한 능력이 되는 그런 믿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이런 능력있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IV. 하나님의 승리에 소망을 두자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까요?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고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읽어드린 이사야의 말씀 속에서 이 구원의 투구는 구원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머리에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쓰셨던 그 구원의 투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투구도 하나님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물건일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보호가 필요 없는 분이시니까요. 이사야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머리에 있는 투구는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적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지 않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서 구원의 투구를 쓰라는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믿음이 정말로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게으르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죄 때문일 수도 있으며, 현실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흐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건져 주셔서 다시 이전의 자리로 되돌아 가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기 어려워 집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때까지 내가 잘 참고 인내할 수 있을까 그게 정말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마지막의 시험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불안함이 심해지면 그야 말로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다시 표현하면 계속해서 하나님 머리에 씌워져 있는 구원의 투구를 생각하며, 내 믿음이 아니라 그 투구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그것조차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번 구원이 필요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똑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고, 하나님께서는 매번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또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머리에는 언제나 구원의 투구가 씌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약해질 때,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투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투구, 하나님이 쓰고 계신 승리의 투구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뛰어드신 전쟁에서 하나님이 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 전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전쟁이니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일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가 구원얻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원래부터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훌륭해서 우리가 구원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의 인내가 충분해서 우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이사야서 59장 17절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얼마나 은혜롭고 든든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변함 없고 끈질긴 하나님의 열심 덕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까지 하나님은 구원의 투구를 쓰고 계실 것이고, 열심의 겉옷을 입고 계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하며, 여기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정말 모든 소망의 끈이 다 끊어졌다고 느껴질 때에도 이 소망만큼은 붙들수 있고 또 붙들어야 합니다. 


V. 결론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가장 중요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실 때까지 그 분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이고,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기실 것입니다. 항상 이 약속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약속에 소망을 두는 일로 여러분의 흔들리는 마음을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있는 은혜 안에 사는 복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의 투구, 그 변함 없는 소망과 승리의 투구를 머리에 쓰고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군사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2. 나를 보며 낙심치 말게 하소서.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소망을 두고, 나의 열심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의지하며 살고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