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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12.25. 주일오전 - 우리의 아멘이신 예수님(2016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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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4절





할렐루야!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우리 주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어떻게 성탄인사는 좀 나누셨습니까? 옆에 계신 분들, 두 세분과 성탄인사 한 번 나눌까요? 이렇게 인사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저는 예수님 때문에 참 좋습니다." 정말 예수님 때문에 좋으시지요? 기쁘시지요? 그 기쁨과 행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변함 없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또 지금 인사 나누신 그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다른 이들을 복주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이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일인데요. 어떻게 성탄선물들은 좀 받으셨습니까?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려서 속만 상하게 해드렸나요? 뭐 괜찮습니다. 저도 선물을 못 받았으니까요.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성탄선물을 하나도 받지 못했을까요? 아니지요. 이미 받았습니다. 받아도 아주 큰 선물,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식상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이 땅에 사람으로, 한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가 받은 성탄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선물로 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셨으니까요.  

그저께 성탄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금요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요 몇년 동안 얼마나 힘들고 상처 많은 세월을 지냈습니까? 지금도 대중매체에서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면 가슴에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럴 때마다 그 상처들이 커도 너무 크고, 깊어도 너무 깊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어서 그런지 그제 기도회는 저에게는 참 남다른 기도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나셨다는 사실이, 성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살아가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벅차게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 하마터면 기도회를 인도하다 말고 울뻔 했습니다. 

영국의 C.S.루이스라는 분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준비하는 기적이었고 또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기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기적이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여서 그렇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 그것도 한 아기가 되신 일은 이 세상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입니다.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질병을 치료 받거나 심지어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보다 더 큰 기적이지요. 이 세상에 그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의 성육신보다 놀랍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기적은 그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과 만물 속에서 잠시 자연법칙을 깨뜨리고 일어나는 기적들이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모든 것들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나의 피조물, 그것도 작고 보잘 것 없는 갓난아기가 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은 언제나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다른 기적들은 항상 작은 것이 커 집니다. 없는 것이 생기고, 약한 것이 강해집니다. 무능했는데 능력있어 지지요.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이건 기적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그것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그 우주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한히 크신 하나님이 작고 여린 갓난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박혁거세처럼 하늘에서 빛이 비추더니 말이 알을 낳는 방법이나, 부처처럼 태어나자 마자 일곱 발자국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특별한 탄생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처럼 한 여인의 몸을 빌어 그 여인의 산고 끝에 탯줄에 달려 생사를 결정하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평범한 가정, 아니 그 당시로는 가장 가난한 목수의 첫 아들로 말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창시자를 더 멋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탄생부터 아주 멋지고 특별하게 꾸미지요. 그래야 그 사람과 그 사람이 만든 종교가 뭔가 그럴 듯하고 믿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것과 정확히 반대로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더 믿기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는 이야기, 그것도 출신이 천한 갓난 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자기들의 믿음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것이 이 세상 그 어떤 기적보다도 놀라운 기적이고 또 은혜로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성육신이 그저 우리와 상관 없이 일어난 기적이라면, 이 기적이 아무리 놀라운 기적이라고 해도 사실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마치 미국에 가면 디즈니랜드가 있는데, 다 구경하려면 일주일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그런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가장 놀라운 기적인 동시에 가장 은혜로운 기적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람이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너무 싫어합니다. 어두운 이야기, 또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너무나 꺼려 합니다. 그게 틀리지 않은 이야기이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이야기인데도 그렇습니다. 사실 부정과 긍정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맞는 것에 대해서는 맞다고 하는 것이 긍정입니다. 반대로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 긍정이구요.  이렇게 부정과 긍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서 긍정적이라는 것을 마치 절대적인 가치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긍정적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둡고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인생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 압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지 다 압니다.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과 자신의 인생이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밝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또 다시 그 어둠을 확인하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무 절망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시대의 유대 땅은 정말 최악의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된 지 이미 오래였고, 그래서 우리가 일제시대를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로마의 심한 수탈 때문에 백성들의 삶을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로마의 이간질 때문에 나라 안에서도 사람들은 갈래 갈래 찢겨져 있었고, 종교는 종교대로 부패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자기들 잇속만 차리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는 언제든지 유대로 다시 쳐들어와서 유대를 멸망시키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어디를 봐도 밝은 구석이 없었고, 그 어디서도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우리나라를 보면서 헬조선, 헬조선하지만 그 당시의 유대는 헬유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 예수님은 이런 어두운 나라의 그 캄캄한 현실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현실을 버리고 떠나고 싶어했지만, 예수님은 그 어둡고 불안하고 힘겨운 삶 속으로 스스로 뛰어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혼자로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최악으로 망가진 나라로, 그것도 가장 망가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실 필요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세상의 가장 낮은 삶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절대로 체험학습이 아닙니다. 체험학습을 한다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본질은 그저 그렇게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초월한 분으로 남아 있으면서 사람처럼 사는 흉내만 내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그들과 함께 매일 매일 부대껴 오는 삶의 무게를 그대로 견디며 살아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그렇게 하셨던 것일까요? 사실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그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 일이야 부처처럼 왕족으로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살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굳이 이런 선택을 하신 것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멘'이라는 한 단어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여기 보면 예수님을 '아멘'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멘’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선 '아멘'이라는 말의 뜻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멘은 이렇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전에 제가 영화 한 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 속에 흑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나왔는데요. 그런데 그 장면 속에서 저에게 굉장히 인상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데 성도들이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Oh, yes!"를 연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바로 그 "Oh, yes!"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강한 긍정이 바로 아멘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아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누군가가 무엇에 대해서 강한 긍정을 표시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무엇에 대한 아멘일까요? 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만물과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신 아멘,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긍정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부정하시는 분이시고 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런 저런 험하고 거친 삶, 부조리하고 온전치 못한 인생을 부정하시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이 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되셨다고 해도 우리들 조차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런 삶 속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No!"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모습을 우리들 보다도 더 분명하게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그 속에 보내시면서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Yes!"를 외치셨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현실에 대해서 No!라고 말해도, 이 세상을 만들고 너희들을 만든 나는 No! 할 수 없다고 말이지요. 

 

고린도 후서 1장 18절과 19절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그리고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때로 우리가 "Yes!"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실망스럽고 아프고 힘겹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직장을 보아도 그렇고, 이 세상 전체를 보아도 그렇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아멘!"이라고, "Yes!"라고 말입니다. 내가 너희의 상황과 아픔과 어려움을 다 알고 있고, 너희가 겪는 불의와 절망스러운 상황을 다 알고 있지만, 내가 너희에게 보낸 예수가 그 모든 일들에 대한 나의 완전한 "Yes!", 충분한 “Yes!" 영원한 아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은 긍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탐욕과 거짓에 대해서는 결코 Yes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낸 이 세상과 고통과 아픔, 절망과 부족함은 있는 그대로 긍정하십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세상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삶을 가치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안타까워 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랑하십니다. 그런 우리들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부둥켜 안으십니다. 그것을 알려 주시고 보여 주시려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갈릴리라는 척박한 곳에서 그렇게 거칠고 구차한 현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 세상, 그리고 여러분이 느끼는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그리 밝고 희망 차게 느껴지지는 않으실 줄로 압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이 나라의 상황, 우리들의 삶의 조건은 밝아올 줄 모르는 한 밤 중 같아 보이니까요. 차라리 모르는 척하고 살아가자 싶기도 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이 어떻든지, 그리고 여러분의 겪어내고 있는 삶의 현실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멘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무거워하는 그 일에 대해서, 여러분이 가장 힘겨워 하는 여러분의 삶의 현실과 부족함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 소리로 yes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들의 아멘이고 우리들의 yes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모든 삶의 조건들에 대해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아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족하고 힘겹지만, 쓰리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멘!'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들려주시는 '아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나 자신과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기쁨으로 '아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 이미 영원히 '아멘!'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완전히 No!라고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절망하고 낙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멘!'소리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의 아멘에 여러분의 아멘을 더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믿음으로 더하는 ‘아멘!’을 통해 우리의 영원하고 완전한 아멘 되시는 예수님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멘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나신 이 계절에 아멘이 없는 이 세상에 아멘이 울려퍼지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몇 가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기도제목을 말씀드리겠으니 같이 기도해 주십시오.]


  1. 먼저 우리를 위한 아멘! 하나님의 아멘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우리의 삶의 모든 것에 대해서 믿음으로 아멘합시다. 그런 믿음을 달라고, 그 믿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멘을 경험하며 살게 하소서. 


  1.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싫어하는 이 현실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 속에 사람이 되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그런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고 이 세상을 그만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람들과 이 세상에 참 마음에 안들지만 그래도 더 사랑하고 더 부둥켜 안고 섬기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이 세상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온 세상에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갈등이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치료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세상을 왕으로 다스려 주소서 기도합니다. 더불어 이 세상에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이웃들, 그들을 고쳐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