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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12.08. 요한복음 12장 1-11절 - "향유냄새가 가득하더라"(요한복음 40)

 

 

날짜 :  2019년 12월 8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1-11절 

 

 

나사로는 예수님 덕분에 잃어버렸던 생명을 되찾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예루살렘의 공회가 모여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니까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될 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얻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죽음의 덫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얻고 새로운 인생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잠시 에브라임이라는 예루살렘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 동네로 피신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내신 마지막 유월절로 향해 다가 가고 있었습니다. 지방에 살던 유대인들도 하나 하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고, 성전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실지 오지 않으실지 궁금해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질문이 정말로 뜻하는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만 생각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려면 스스로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엿 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예수님은 다시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지요. 이제 예수님은 그렇게 예루살렘의 코 앞에 와 계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한주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이것이 2절이 그려주는 그 집안 풍경인데요.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많이 보던 광경이 또 다시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 가족에게는 늘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마르다는 늘 부엌에서 일을 합니다. 늘 손님들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지요. 그러는 동안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언니야 뭘 하든 말든 자기는 그저 예수님 곁에 앉아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꿀처럼 단 예수님의 말씀만 받아 먹습니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은 늘 티격태격하지요. 저는 오늘 집안 풍경도 당연히 그렇게 그려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던 것인데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오늘은 그림이 약간 바뀌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마리아가 아니라 나사로가 앉아 있습니다. 나사로가 거기 앉아 예전과 똑같은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언니 곁에서 언니를 돕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손을 놀려 수고하는 것은 여전히 마르다 밖에 없습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등만 보여줄 뿐입니다. 저는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마르다는 화가 났을까, 이번에도 마르다는 투덜거리고 있을까? 그걸 참느라고 밀가루 반죽을 패대기치면서 화풀이를 하고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르다는 이번에도 골이 났을까요? 엄청난 일관성을 자랑하는 마리아 때문에 볼이 이만큼 부어 있을까요? 저기 보이는 등 뒤에 있는 마리아의 얼굴표정은 어떨까요? 마르다는 웃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일이 아무리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 많은 일을 자기 혼자 하고 있으면 또 어떻고, 마리아가 코빼기도 안 보이면 어떻습니까? 죽었던 올아비가 저 만치 앉아있고, 그 올아비를 살려내신 예수님이 거기 계시는데, 그걸 함께 축하하겠다고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 즐거워 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의 모임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이 잔치 속에서 천국의 모습을 훔쳐 보았고, 천국의 잔치를 미리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거기서도 우리 주님은 주인과 주인공으로 거기 계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 우리 주님이시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그 예수님 덕분에 서로가 서로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주고, 서로의 영생을 축하하며 같이 기뻐하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 날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누가 더 사랑했고, 누가 덜 사랑했는지, 누가 더 섬겼고, 누가 덜 섬겼는지… 그런 것 따지거나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덜 사랑했다고, 내가 덜 섬겼고 내가 덜 수고했다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해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큼은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수고하겠다고 다짐하며 천국의 부엌떼기 자리도 영광스러워 할 것입니다.  

흔히들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분점이고 모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를 천국의 모형으로 두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경험하며 배우는 곳으로,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그런 곳으로 이 세상에 교회를 두셨지요. 현실의 교회의 모습이 아무리 부족하고 형편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들을 교회로 이 세상에 두셨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고 은혜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장본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이니까요. 저는 눈에 보이는 현실 교회의 모습이 아무리 안타깝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완전히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러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가 보는 그 모습이 교회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문득 문득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엿보게 되는 그 교회의 모습이 교회의 진짜 모습이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당신의 교회를 그렇게 회복시키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늘 부족하고 형편 없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도 너무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에게 주신 자리에서 하늘 그림의 괜찮은 한 조각이 되어 보려고 끙끙대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게 자랑도 뭣도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천국을 흉내내고 연습하는 곳입니다. 잘 되고 커지기 위해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 안에서 천국을 흉내내고 맛보며, 그렇게 함께 천국을 꿈꾸며 살아가라고 주님께서 피값주고 사신 너무나 귀한 믿음과 소망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천국을 흉내내고 그래서 천국을 맛볼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비로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만 전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저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모두가 함께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함께 축하하고 기뻐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혼자서 타닥 타닥 칼질을 하면서도 그 음식 맛있게 먹어줄 지체들의 미소가 떠올라 흥얼 흥얼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곳이 바로 땅에서 누리는 하늘나라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천국을 보여주려고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렇게 천국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안에 그 싹이 트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미 교회를 섬기고 서로를 대하는 여러분의 모습과 표정 속에서 그 작은 싹을 보고 있으니까요. 더 힘을 냅시다. 더 애쓰십시다. 늘 예수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고, 서로를 통해 부활과 영생을 확인하며 서로를 위해 더 기쁘게 섬기십시다. 그렇게 이 싹들을 잘 키워 보십시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이 새싹이 열매 풍성한 나무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에게로 가 볼까요? 한 참을 안 보이던 마리아가 집안 깊숙한 곳에서 병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대번에 그게 무엇인지를 알아 차렸을 겁니다. 워낙에 귀하고 값진 것이었으니까요. 그것은 밀봉이 되어 있는 ‘나드’라고 불리는 정말 귀한 향유였는데, 얼추 보아도 그게 한 근은 족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향유는 대개 한 사람이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서 준비해 놓거나 아니면 딸이 부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산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왜 저 귀한 걸 가지고 나오나 했을 것입니다. 방안을 향기롭게 하려고? 아니면 예수님께 저걸 자랑하려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겠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가만히 예수님 발치로 다가가더니 망설임 없이 그 병의 입구를 깨뜨리고, 향유 한 병을 전부 다 예수님의 발에 들이 부은 것입니다.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건 그 당시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요. 첫째, 그것은 너무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그렇고, 자기 오빠를 살려주었어도 그렇지 그렇게 비싼 것을 더러운 발 한 번 씻자고 한 번에 다 들이 붓다니! 그것은 누가 보아도 바보같은 낭비로 보일 수 밖에 없었지요. 아마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속으로는 화를 내거나 혀를 찼을 지도 모릅니다. 둘째, 그것은 정숙한 여인이라면 도무지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인의 머리카락은 여인의 영광이고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머리카락을 함부로 내놓고 다닐 수도 없었지요. 지금도 성당에 가면 여자 성도들은 머리에 베일을 쓰는데 그게 그래서 생겨난 풍습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여인이 자기 머리를 함부로 드러내는 것은 천박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맨 머리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것이 지금까지 전통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당시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저거 저거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라고 할만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그게 낭비라거나 하면 안되는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거나 하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마리아도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마중하러 나가서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을 듣고서 대답으로 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 속에서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 그 당시로서는 참 대단하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었지만 아직은 알맹이가 제대로 차 있지 않은 덜 영근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그 말이 진짜로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는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사람이 하는 말과 그 사람의 신앙이 늘 일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그 사람의 신앙을 전부 다 담고 있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말로 신앙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과 행동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실제로 내보이는 행동과 태도가 우리의 신앙이 어떤지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리아의 신앙고백은 나사로의 일로 알맹이가 꽉 찬 제대로 영근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되살리신 일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까요. 아마 여러분도 마리아가 어떤 성향을 가진 여인인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함께 모일 때, 마리아의 자리는 늘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늘 거기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무엇보다 좋아했지요. 그래서, 마리아는 누구 보다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말씀이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그 날, 그렇게 담겨 있던 말씀들이 다시 살아나 서로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마리아의 영혼 속에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참 믿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차곡 차곡 마음에 담아놓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말씀은 한 구절 구절이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면 그 간에 쌓아놓았던 모든 말씀이 우리 안에서 폭발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우리는 그 말씀들의 진짜 은혜와 능력을 알게 되지요.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이 시점에 이르면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게하며 또 우리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나사로의 일로 마리아는 그 간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모든 말씀들이 사실이고 진리일 뿐 아니라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지를 제대로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고 높으신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겠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이렇게 예수님이 얼마나 높고 귀하신지를 제대로 알게 되자 그제서야 볼 수 있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낮고 형편 없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 동안 그렇게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며 예수님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귀한 분이신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를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나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그래서 나의 작음을 알게 되는 그런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그런 복된 경험을 말이지요. 

그 날 마리아가 보인 행동은 모두 그러한 마리아의 깨달음과 변화로부터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살펴 보면, 우선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모두 예수님의 발에 부었는데요. 향유는 원래 발에 붓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 붓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예수님의 머리가 아니라 발에 향유를 부었을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마리아가 비로소 알게된 예수님의 진짜 가치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알게 된 예수님은 귀하고 또 귀한 분이셨습니다. 높고 또 높은 분이셨지요. 아무리 가치있는 것을 가져다 드려도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조차 않을만큼 귀하고 또 귀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향유를 감히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일년치 노동자의 봉급과 맞먹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그 향유가 너무 가치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당시 주인의 발을 씻는 일은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비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지요. 여러분,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종들 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종이나 하는 일, 사실 종마저도 하기를 꺼리는 그런 일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아무리 미천한 종이라고 해도 주인의 발을 씻어 준 다음에는 수건으로 닦지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라 주인도 자기 종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하는 법은 않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여인에게 머리카락은 자존심이고 영광인데,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보다 여인에게 더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는데도 마리아는 기쁘게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그런 마리아를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로 비난하는데요. 요한의 설명처럼 이것은 위선이고 거짓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았다고 뭐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그걸 그냥 예수님께 드렸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회계인 자기에게 그것을 주었을 테고 그러면 그걸 팔아서 슬쩍 일부를 착복할 수 있었을텐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에 화가 났고, 그래서 그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튼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쏟아부은 향유의 값어치가 최소한 300데나리온 정도는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계산에 빠른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계산 빠른 가룟 유다는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가치는 전혀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은 그 향유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그 값진 것을 진짜로 가치있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요. 그게 자기 속내를 감추기 위한 위선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가룟 유다의 그 일에 대한 가치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향유의 주인이었던 마리아는 그 엄청난 것을 딱 한 번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기 위해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형편 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이렇게 상반되는 가치판단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입니다. 그 관점의 차이가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예수님만 섬기기 위해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 신앙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요.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누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참된 회심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서 ‘예수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주된 관심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실까, 내가 예수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마리아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리아의 중심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완전히 옮겨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에 그 귀한 향유를 다 쏟아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더러운 발을 씻겨 드리면서도 그것을 아깝다거나 창피한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중심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3년을 예수님을 쫓아 다니면서 예수님에게서 배웠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삶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내가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까?’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찮은 것도 내놓지 않으면서 정작 그렇게 귀한 것으로 예수님을 아름답게 섬기는 마리아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절대로 ‘나’ 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나, 나를 생각하면 그 사람은 전혀 신앙의 핵심에 가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신앙의 참된 영광과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 날, 나사로의 집은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였습니다. 그 모임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고, 다들 그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들었고, 또 예수님을 기뻐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그 날 그 자리에는 부활의 기쁨과 영생의 확신까지 넘쳐 흐르고 있었으니 그 날 그 곳이 바로 이 세상 가장 온전한 예배의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마리아와 가룟 유다도 있었지요. 그렇다면요, 성도 여러분. 그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장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고 또 그 예배의 기쁨과 은혜를 제대로 맛보고 누렸을까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고 높은 분이신지를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 예수님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 가장 값진 것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자존심과 영광까지도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 기쁘게 내려 놓았습니다. 그 날 마리아는 자신의 면류관을 드려 어린 양을 예배했던 보좌 앞의 이 십사 장로들처럼 그렇게 충만하고 기쁨 넘치는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았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 가치만큼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리아가 드린 예배의 가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식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말이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 행동을 단순한 섬김의 행동이 아니라 유일하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해 준 귀한 일로 받아들여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었고 말이지요. 우리가 마리아의 예배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진짜 가치를 잘 모릅니다. 때로는 너무 과대평가하고 때로는 너무 과소평가합니다. 가치있는 일을 가치 없게 하기도 하고, 가치 없는 일을 가치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예수님이 얼마나 참된 귀한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의 가치에 걸맞게 하려고 애쓰는 모든 일은 그 일이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우리 주님은 그것을 가장 가치있고 귀한 섬김과 예배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과도, 아니 이 세상 전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히 높고 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해 주시려고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받은 복된 사람들로서, 언제나 마리아처럼 주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가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주님을 높여드리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는 영광과 은혜를 누리시가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당신의 높으심과 귀하심을 깨닫게 해 주셔서 이 복을 한 없이 누리며, 귀한 향유의 향기 가득한 인생을 사는 참 예배자가 되는 은혜를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