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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12.22. 요한복음 12장 22-33절 "인자의 영광, 우리의 영광"(요한복음 42)

 

 

날짜 :  2019년 12월 22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20-33절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처럼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거기 모여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고요. 그것은 단순히 어떤 영웅적인 사람에 대한 환호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기름부음 받은 다음에 이루어진 대관식이었고 대관식의 행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그렇게 당신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왕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면서 당당하게 왕의 도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을 구원해 줄 왕으로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의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이제 유대교인이 되려는 사람들이나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유월절 순례객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지요. 당연히 이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 그리고 행하신 일들, 특히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엄청난 환영을 받으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요. 그래서,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들 중에서 몇몇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이 약속하는 그 메시야가 분명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남 이야기 하듯이 하실 때 사용하시던 표현인데, 사실 이 ‘인자’라는 말은 에스겔서과 다니엘서에서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날 헬라 사람 몇몇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자신이 메시야와 왕으로 제대로 높여지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싸인으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헬라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길래 예수님은 그 일을 그렇게 큰 일로 여기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고 다윗왕국의 영광을 되찾아 줄 유대인들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온 세상을 죄와 죽음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왕으로 오셨지요. 그러니, 헬라인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곧 12장 19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온 세상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왕이요, 메시야로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고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이제야 비로소 예수님이 온 세상을 위한 왕이 되시고 또 세상의 왕노릇 하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왕은 왕좌에 앉아 자기 나라를 다스릴 때가 제일 영광스러운 법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인자의 영광’이라는 말로 운을 떼셨기 때문에, 그 뒤에 무슨 말씀이 이어질까, 과연 어떤 왕이 되실까 제자들은 큰 기대를 가졌을 겁니다. 적어도 ‘영광’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말씀이 이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계속되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지금은 힘을 이야기 해야 합니다. 승리를 이야기하고 정복을 이야기 해야 합니다. 부와 권력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요. 그것이 백성들이 원하고 왕의 측근들이 바라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새로 왕이 된 사람이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제자들이 그 이야기를 못 알아들을까 싶어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하게 풀어 설명까지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인자의 영광이었고, 그 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무나 특별한 왕입니다. 세상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독특한 왕이었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려는 왕의 역할이 이 세상의 왕들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으로서 자신의 소명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땅에 떨어져서 자신을 닮은 수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 말이지요. 여러분, 씨앗의 유일한 역할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씨앗의 가장 큰 영광은요? 그것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은 씨앗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죽어야 합니다. 그 죽음이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그래서 씨앗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씨앗의 영광을 얻으려면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씨앗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삶의 방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짧은 죽음에 대한 말씀들로 당신의 대관식 연설을 대신하셨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왕이신 예수님의 대관식 연설문이고 소명선언문이었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 그러니까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들려 주는 왕을 섬길 때 지켜야 할 원칙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신하가 왕을 섬기려면 그 신하는 반드시 왕을 따라 왕이 가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거기 머물러야 합니다. 엉뚱한 곳으로 가고 다른 곳에 있으면서 왕을 섬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 왕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우리 왕은 어디 계시지요? 십자가 입니다. 우리 왕은 늘 십자가를 향해 가시고 십자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거기가 당신의 생명을 한 알의 밀알로 내어주시고, 많은 열매를 맺으시는 곳이며, 그래서 예수님께는 그 곳이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은 늘 십자가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예수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원리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가치를 씨앗의 가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씨앗은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씨앗은 열매를 많이 맺을 때, 빛이 나고 영광스러워지지요. 그런데, 씨앗이 열매가 되려면 씨앗은 반드시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씨앗에게는 자기의 죽음이 자신 가치를 드러내고 영광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이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라는 씨앗에서 생명을 얻은 열매들인데, 열매들이란 원래 새로운 씨앗을 담는 그릇이고 그래서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우리들도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의 생명을 씨앗으로 내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씨앗에서 씨앗으로 생명이 생명을 낳는 일이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그리 밝지가 못한데요’ 혹은 ‘왜 이렇게 분위기가 무겁지요?) 우리는 원래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숨이, 생명이라는 것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내놓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될 수 있는대로 자기 생명을 단단히 붙들고 지켜내려고 합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거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 그 죽음이 두렵고 싫어서 계속 나의 생명을 꼭 붙들고 지켜내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하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자꾸 자기 중심적이 되고 이기적이 되며,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오늘 주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을 위해서 간직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생각과 주님의 말씀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둘 중에서 무엇이 맞는지 따져 보고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선택을 하는 것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우선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내내려고 그 생명을 꼭 움켜쥐고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며 산다는 뜻이 되지요. 그렇게 하면 당장은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생명에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게 되니까요. 그래서, 그것이 자기 생명을 잘 지켜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만 하면 씨앗은 어떻게 될까요? 그 씨앗은 결국 죽고 사라지게 됩니다. 생명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지요. 그런 씨앗은 마치 작은 주머니 속에 감춰놓은 씨앗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그 모양 그대로 곱게 곱게 지켜낼 수 있지만, 죽고 썩고 사라지는 시간문제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자기 생명도 죽게 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진짜로 싫어서 미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좀 초딩입맛입니다. 그래서, 후라이드 치킨도 좋아하고 떡볶이도 좋아합니다. 그러면 제가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좋아할까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치킨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떡볶이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굉장히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그 날 따라 떡볶이를 먹고 싶을 때면 더 그렇지요.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 골라야 하니 어쩝니까? 결국 한 가지를 위해서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는 정말 안타깝지요. 제일 좋아하는 치킨을 고르기는 하지만 그러는 마음이 그렇게 기쁘질 않습니다. 떡볶이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까요. 저는 떡복이도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하지요. 하지만, 치킨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치킨을 얻기 위해서 떡복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생명을 지키고 부풀리기 위해서 다른 생명에 손해를 입히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오염물질을 마구 내보내고, 도둑질을 하고 속입니다. 억지로 빼앗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자기 생명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것 같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요.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걸 이겨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을 선택하고, 자기 생명을 다른 열매를 위한 씨앗으로 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은 죽을 것 같습니다. 손해를 보고 아픔을 겪고 희생해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피같은 돈이 들어가고 아까운 시간이 들어가고... 내 의견 한 번 접고, 내 고집 한 번 꺾는 일도 죽는 것 같이 힘들어 하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런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죽는 것처럼 힘들 수가 있지요. 하지만, 어떤가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죽습니까? 그렇게 살면 죽음으로 끝이 나나요? 아닙니다. 그런다고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그저 죽음으로 끝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삶은 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 죽음에서 새로운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무슨 일로 어떤 분과 좀 불편한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요. 분명히 화를 내고 불쾌해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 분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해해 주시고, 너무나 부드럽게 받아 주셨습니다. 정말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그 분께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편하기만 한 일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그 때 분명히 자신을 죽이셨을 겁니다. 저를 생각하고 또 덕을 세우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지요? 그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제가 한숨 돌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큰 감동을 받았고, 적지 않은 위로와 기쁨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분이 조금 미워한 자기 생명이 저에게는 그렇게 크고 풍성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그 분의 작은 죽음이 제 안에서 더 큰 생명의 씨앗이 되었고, 그래서 그 분의 생명이 제 안에서 더 풍성하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이야기 일까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2,000년 전에 단 한 번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전히 끝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십자가 안에서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생명의 기적은 오늘날도 십자가로 다가가서 십자가를 흉내내며 자기 생명을 미워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날도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을 통해 그런 일들이 더 풍성하게 계속되어 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냥 우리 몸의 생명만을 생각한다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든 미워하든 사람은 어쨋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물학적인 생명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적인 생명을 생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한다면, 결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지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방식으로 살면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생명, 내가 나누어준 생명에서 맺혀진 열매들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계속되니까요. 그러니, 어떻습니까? 우리가 죽음과 생명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받고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생명을 미워하는 방식으로 살면서 우리의 생명을 영생하도록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히 여김을 받게 되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그저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생명을 지키려고 바둥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거의 모든 문제들이 생겨나며 우리 자신도 풍성하고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굳이 생명이 아니라도,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은 안으로는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이 되고, 밖으로는 탐욕스러워지게 됩니다. 광장히 예민해 지고 공격적이 되며, 자기 자신만 아는 인간이 되지요. 어릴 적 동화에 나왔던 자기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 높은 성을 쌓아놓고 저 혼자 그 안에서 겨울같은 삶을 살았던 거인처럼 되어 버립니다.  

물론 우리가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생명을 씨앗으로 내어주며 산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살지 않고, 우리의 본능 또한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실제적인 불편함과 손해가 있으니까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께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자기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영광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27절에서처럼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 때를 위하여 왔나이다”라고 기도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 생명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정말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생명을 선물하는 방법이고 그 생명 안에서 나의 생명을 영원히 지켜내는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힘과 결단만으로는 이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생명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너무나 지독하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끊임 없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이 고래심줄같은 질긴 내 생명에 대한 집착에서 풀어 자유케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간절한 기도가 그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생명을 한 알의 밀알로 내놓으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자의 영광이 바로 우리의 영광입니다. 세상의 빛나는 것들이나 우리가 억지로 움켜 쥔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우리 생명을 씨앗 삼아 맺히는 열매들이 바로 우리의 진짜 영광이고 영원한 영광입니다. 우리의 영광을 무엇인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주신 생명으로 늘 그 영광을 위해서 씨뿌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늘 기도를 통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용기를 얻으면서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꿔 주시고, 자신의 생명을 미워할 수 있을만큼 넉넉하고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인자의 영광이 나의 영광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서 주신 내 생명 움켜쥐고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이 세상과 이웃들을 위한 새 생명의 씨앗으로 내놓게 하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