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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1.26. 요한복음 12장 37-50절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요한복음 43)

 

 

 

날짜 :  2020년 1월 26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37-50절 

 

 

성도 여러분,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는 어떻게 얻지요? 네. 맞습니다. 믿음으로 얻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이 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은 특별히 더 이 ‘믿음’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쓰여졌으니까요.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중간 중간에 ‘믿었다’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누구누구가 믿었다’는 말을 자주하는 것은 그렇게 믿은 사람들 모두가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한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믿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면 다 같은 믿음이고, 그저 믿기만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 믿음에도 영생을 얻게 하는 믿음과 그렇지 못한 믿음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만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사도 요한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것도 믿음이고 저것도 믿음 같지만 실제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은 대부분이 예수님께 적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 늘 딴지를 걸려고만 했지요. 있지도 않은 예수님의 헛점과 잘못을 들춰내고 정죄를 해서,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을 떼어 놓고, 예수님을 적당하게 처리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유대인들’에 대한 굉장히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것은 관원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숫자가 예수를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많았다니 그것은 정말로 놀랍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하지만 곧바로 요한은 안타깝게도 그 관원들이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못했다는 보고를 덧붙입니다. 회교권이나 중국같은 곳에 사는 성도들처럼 꼭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야만 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숨기는 것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 관원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죽이기로 결정한 곳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그리고 이 관원들은 그 공회원이었기 때문에 공회가 열릴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요. 하지만 이 관원들은 출교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공회의 결정에 동조하는 공범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같은 사람은 혼자서 공회의 그런 결정의 부당함을 항변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렇다면요, 성도 여러분. 이 관원들의 믿음은 믿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분명히 믿음은 믿음이었을 겁니다. 요한도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한 번 더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과연 이 사람들을 구원할만한 믿음이었을까요, 아니었을까요? 물론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이 사람들 중에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할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때까지는 이 관원들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관원들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출교를 당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 하면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이 더 많아지게 되지요. 관원들은 우선 자기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잃어버립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선택하면 말그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커도 너무나 컸지요. 그래서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대학시절에 저의 선배가 경험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선배는 늘 자기가 살고 싶은 삶과 성경이 요구하는 삶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은 작고하신 성공회 대천덕 신부님의 신앙 강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강연이 끝나고 신부님과 공개적으로 대화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배가 손을 들고 신부님에게 물었답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면 어느 정도의 댓가를 지불해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신부님이 아주 간단하게 그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당신의 전부입니다. 다음 분 질문하세요.”라고 말이지요. 그 선배는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와 그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 주었는데요. 그 후로도 그 선배는 계속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더 잘 살아보려고 미국으로 건너 갔는데요. 결국 그 선배는 미국에서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선배가 누군가하면 몇 년 전에 오후예배 때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했던 안성호 선교사입니다. 결국 그 선배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드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는 오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성도는 모두 자기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외 없이 말이지요. 그러니, 모든 성도들은 전부 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흔히 그렇게 생각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기포기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붙잡으라고,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A가 있고, B가 있습니다. 그리고 A를 선택할 수도 있고, B를 선택해도 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그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A대신에 B를 선택한다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이 사람에게 A보다 B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귀하며, 그래서 A보다 B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 늘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고통과 손해를 강요하는 말씀이 아니라 네가 나의 가치를 알고 내가 너에게 주는 영생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안다면 너는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값진 진주를 찾던 상인처럼,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그만한 가치가 없는 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억지가 되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덜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더 가치있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 주님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나요? 우리 주님을 내어주면서까지 얻어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이 세상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값집니다. 예수님 자체가 그렇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거듭난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늘 일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말로 가치있다고 여기며, 그래서 사랑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정치가들이 제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권력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곁에 두려고 그렇게 안깐힘을 다하지요. 그러면 그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권력입니다. 그래서 그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며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음이라” 관원들의 두려움 뒤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주는 것들, 사람에게서 얻는 영광을 가장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엇보다도 사랑했지요.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도 말입니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그들이 뭘 버리고 뭘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관원이라는 신분이 주는 부와 권력, 사람들의 인정과 명예…. 이런 것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노회에서 하루 수련회를 했습니다. 한 50명쯤 되는 노회원들이 참석했었는데요. 정말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을 강사로 초빙해서 정말 너무나 값지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적지 않은 분들이 수련회가 다 끝났는데도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우연히 함께 임원을 하는 장로님 한 분을 만났는데요. 그 분이 상기된 얼굴로 그러시더라고요. “목사님, 오늘 말씀 정말 은혜로웠지요? 저도 그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저는 그 말이 너무 반가워서 활짝 웃으면서 “그렇게 사시면 되시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 금새 목소리의 톤이 낮아지더니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서 씀을 계단을 내려가시는 뒷모습이 참 많이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반대 쪽으로 달려가는 열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개의 열차를 동시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광이라는 열차를 올라타면 그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38절에 한 번, 40절에 또 한 번 이사야서의 말씀이 두 번 인용되고 있는데요, 이 말씀들은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였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는 37절 말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부터 시작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까지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것만 일곱 개 인데요. 요한이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표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단순한 기적들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였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지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은 그 엄청난 표적들을 보고 또 보았으면서도 전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이해하기 힘든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이사야서의 말씀들을 인용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듣는 일에 실패해도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완전히 실패했지요.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구원은 인간의 반응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은혜에 달려 있으니까요. 사도 요한은 39절에 나오는 이사야 53장 1절 말씀 속에서 그런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완고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믿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 사람에게 정말로 치명적인 결과를 남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믿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또 들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신에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지요.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그들에게 직접 벌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사야는 이사야서 6장에서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리신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계속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요한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이 안타깝게도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집스럽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면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눈을 뜨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시거나 깨닫고 돌이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억지로 완악하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고의적으로, 그리고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을 주시면 애써 그 깨달음을 무시했고요. 그래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 마지막 주자가 바로 예수님이셨고, 예수님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무시하는 일이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당장은 우리 마음과 신앙에 심각한 사태를 일으키지 않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내 생각이나 나의 삶과 부딛히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달게 듣고 순종하는 대신에 슬쩍 흘려 버립니다. 못 들은 척 하고 살고요. 깨달음이 생겨도 그 깨달음을 돌이킴과 순종으로 옮겨내려고 하지 않지요. 마음은 조금 불편해도 그것보다는 내 삶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힘드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런 불편한 마음을 무시하고 계속 그런 일을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순간부터는 진리다, 거룩이다, 죄다, 회개다… 반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귀찮아지고 실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심하면 불쾌한 감정까지 생기고요. 깊이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깨닫고 뉘우치고 돌이키고… 이런 일들이 다 번거롭게 여겨집니다. 진지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점점 관심이 없어지고, 대충 해 오던대로 내가 정해놓은 범위와내가 편안한 그 바운더리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눈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마음은 완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말이지요. 

46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해도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직접 벌주시고 심판한 적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구원과 영생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또 들려 주셨습니다. 나를 믿고 내 말을 믿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고 믿지 않으려고 하면, 진짜로 예수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칼이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의 영광’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주는 영광, 내가 사람들에게서 얻는 영광.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믿음다워지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해 영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는 가장 높고 큰 장애물입니다. 돈, 권력, 명예, 자랑, 편리함, 안락함, 쾌락, 칭찬, 심지어 나의 행복까지 … 우리가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게 되면 말이지요. 신앙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시던 우리 주님의 탄식을 잊으면 안됩니다. 무시해서도 안되고요. 계속해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이 주는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 믿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니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잘 살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에 대한 사랑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말이지요. 그리고, 자기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지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늘 사람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이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처럼, 밭에 감추어진 보배를 발견한 농부처럼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한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이 되고, 넉넉하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참 믿음을 주소서. 
  2.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을 주셔서,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