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3.29. 요한복음 14장 15-31절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요한복음 50)

 

 

 

날짜 :  2020년 3월 29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4장 15-31절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참 많습니다. 교인, 크리스챤, 성도, 신자, 하나님의 백성 등. 무엇을 기준과 중심으로 삼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고, 각각의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무게감도 많이 다릅니다. 어떤 것은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런 이름들 중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은 크리스챤입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아무 주저 없이 “그럼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든지 간에, 우리를 부르는 모든 이름들은 그 무게가 전부다 똑같습니다. 전부 다 온전히 예수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이 특별히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이 말의 강조점이 믿음보다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신자가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도 없습니다.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외 없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습을 흉내내며 사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제자란 본디 스승에게 배우고, 그 스승이 살아간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 주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지난 주일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선 제자들이 하늘의 소망을 품고, 자기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에 의지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세 가지 특별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늘에 나를 위한 영원한 거처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걸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기도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기도로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힘들을 얻으며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신 성령님에 대한 또 다른 약속을 주시는데요.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 함께 살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충만하게 해 주시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은 15절부터 31절까지 계속되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31절까지 가는 동안 같은 말씀을 네 번 씩이나 반복하고 계시지요. 그만큼 이 두 가지가 성령을 받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님은 제자들을 제자답게 일하고 또 살아가게 해 주시려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님의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원본이 있어야 사본이 괜찮은 사본인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그 원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원본은 31절에 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들이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세히 들어가 보면 그 숫자만큼이나 각각의 이유와 목적도 다양하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모든 일들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고 가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께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뜻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로 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빼면 껍데기 밖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힘과 결심만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 있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이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동기와 힘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제일 먼저 챙기고 키워가야 할 것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인데, 자꾸 무엇을 하는 것에 치중하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신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섬김에는 기쁨이 없어지고, 우리의 순종에는 즐거움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가 내가 다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말이지요. 모두 다 우리의 행위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의와 열심에서 나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고요. 그래서 사랑이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보혜사로서 주시는 특별한 복과 은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시는데요. 그렇다면, 이미 보혜사가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 보혜사를 대신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고요. 그러면 그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그 보혜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 곁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이 다 보혜사의 일이었는데, 앞으로는 성령님께서 그 일을 대신 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말은 정말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보혜사는 우선 피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 해 주는 사람입니다. 변호사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늘 함께 하는 사람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며, 도와주고 돌봐주고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그런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그야 말로 제자들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지요. 성령님이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은 앞으로는 성령님께서 이 역할을 대신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님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특별한 보혜사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었지만, 성령님께서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몸을 가진 예수님은 제자들과 몸으로 ‘함께’ 계시는데서 그쳤지만, 성령님은 제자들 ‘안에’ 계실 것입니다. 앞으로 성령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그런 보혜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렇게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된 일이지요.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그리고 심지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완전한 보혜사를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성령의 시대인 이 시대를 역사상 가장 복된 시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런 복을 누려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이러한 보혜사 성령님 덕분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도 전부 다 보혜사 성령님 덕분입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모든 일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과 함께 사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나요?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보혜사되어 주시는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사십니까? 꼭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늘 성령님을 사모하고 이 은혜를 사모하며, 이 은혜 안에서 이 은혜의 힘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내실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보혜사의 역할을 해 주신다는 측면에서 예수님보다 더 나은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18절부터는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바른 길을 가려고 할 때, 바른 길 자체도 쉽지 않지만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길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의심과 불안,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 같은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 일 자체로도 쉽지 않지만, 그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그렇게 살려고 하면 늘 여기 저기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힘이 들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혹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기고, 깊은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 길에서 벗어나 남들이 다 가는 그 길로 가고 싶다는 유혹을 받게 되지요. 당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유혹은 정말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18절을 보면 ‘너희에게 오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9절에는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는 말씀이 있고요. 20절에는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에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과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씀이 있고, 23절에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일들은 하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믿는 사람들과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전부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보여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며,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전부 다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행하시는 일들이고, 그래서 우리 영혼만 알고 느낄 수 있는 일들이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눈 앞에서 일어난 산사태를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생생한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확신을 얻어 다시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꽤 까다로운 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목회자로 부름받았을 때 참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그게 주님의 뜻이니 그저 사랑하려고 했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지요. 예전 같으면 꼴도 보기 싫을 사람들이, 화가 나서 얼굴도 마주할 수 없을 그 사람들이 밉지가 않은 겁니다. 별 불편함 없이 대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 일 자체도 너무나 놀라운 은혜이지만, 그 일 때문에 저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쓸 때, 성령님은 늘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저 자기에게는 아빠가 있다는 생각만 가지고 아버지 없이 사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 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보고 느끼고, 알아가며, 하나님의 생생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첫번째 은혜라면 그 두 번째 은혜는 성령님께서 그들의 선생이 되어 주시는 것인데요.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지금은 첫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지만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면, 그 일을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맡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새로운 말씀을 전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일깨워 주시지요. 그것은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신데,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말씀의 뜻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러분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딱 한 구절 때문에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었던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런 은혜가 주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진리를 아는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비춰주시면 그 말씀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적용됩니다. 그 말씀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거기까기 영향을 미치지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들은 말씀에 붙잡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를 근본부터 변화시키고,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기쁨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때,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지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거듭남이란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속에 성령님께서 주신 새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성령님과 교통하며 성령님께 배우는 사람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이렇게 놀랍게 바꿔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에 하시는 일이지만, 이 일은 사실 예수님도 하지 못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럽고 놀라운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가르쳤지만, 제자들조차도 그렇게 변화되지는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일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배처럼 여기며, 이 세상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속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기적같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제자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지요.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평안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는 전혀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꺼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보다 더 평안한 삶이 없습니다. 분명히 어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어도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늘 성령충만하셨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그 평안이 얼마나 크고 견고했든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실 때에도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빌어 주실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고 싶어하셨던 ‘나의 평안’, 그러니까 성령께서 주신 ‘예수님의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이 세상에 기초를 둔 평안이 얼마나 약하고 불안한지를 정말 여과없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이 가진 예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고 진짜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허공에다 억지로 붙들어 놓은 가짜 평안이니까요. 그래서 이 평안이 흔들릴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심하게 요동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가짜 평안, 불안하고 위험한 평안에 의지해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진짜 평안의 비결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님께서 거하실 거처가 되라고 말이지요. 성령님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처럼 평안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충만하게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지요. 늘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들을 잊지 마시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사시고, 성령님께 말씀을 배우는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세상은 알 수 없는 참 평안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늘 성령충만하여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