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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5.31. 요한복음 16장 12-15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2)"(요한 59)

 

 

날짜 :  2020년 5월 31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6장 12절 - 15절

 

 

지난 주일에는 성령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 보았는데요. 이 세상을 위한 성령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책망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성령님께서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성령님께서 이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꾸짖어 주셨고, 우리가 그 꾸짖음을 듣고 예수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여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성령님은 이 일을 하실 때, 혼자서 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성령님의 책망을 받고 예수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통해 이 일을 하시지요. 성도들을 이 세상을 책망할 사람들로 만드셔서 세상에 살게 하시면서 성도들의 말과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 그것이 성령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우리는 세상에 편승해서, 세상을 닮은 삶을 살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아 지고, 그러면 세상을 꾸짖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것은  단순히 성령님에 대한 정보를 주시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그걸 알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령님께서 앞으로 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실테니까요. 하지만, 애초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은 그들이 ‘세상’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 이 말씀으로 제자들이 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을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힘과 결심만으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근본적으로 성령님께서 제자들 안에서 이루어 가셔야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져 가려면 제자들 쪽에서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을 세상을 책망하는 사람들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님 안에서 그 부르심에 함당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이것은 절대로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이 세상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들로 멋지게 빚어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미 그 일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이 일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 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반응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만큼 더디게 진척될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성령님은 절대로 이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에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셨고, 성령님은 우리를 세상을 책망하는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성령님 안에서 우리들과 이 세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세상의 말을 따라주어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도 이미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았으니까요.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자체와 싸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예수 안에서 나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을 책망하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늘 우리를 이 영광스럽고 평강 넘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세상을 꾸짖으실 것이라는 것이 16장 5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이었다면, 12절부터 15절까지는 그 성령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실지를 일러 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1절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에게도 그렇지만, 그 옛날 제자들에게도 참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큰 관심도 가지 않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고요. 그래서, 그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말씀을 감당한다?’ 늘 대하던 말씀이고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말씀인데, 갑자기 ‘감당한다’는 말의 좀 더 정확한 뜻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사전을 뒤져 에서 이 단어를 찾아 보았는데요. 그랬더니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짐을 진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두 가지 설명을 함께 놓고서 보니, ‘아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삶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는 놀라운 선물들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능력과 기쁨, 지혜와 지식, 믿음과 소망을 담은 보물상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말씀이 지기 힘든 짐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관원이 그랬지요. 그는 그렇게 듣고 싶어했던 영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감당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 날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직은 말씀을 짊어질 영적인 근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 말씀을 짊어질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당장은 감당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짐을 지우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시며,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시지요. 아마 겪어 보신 분은 다 아실 겁니다. 감당하기 힘든 말씀에 붙잡히는 일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를 말이지요. 주님께서 그걸 모르셔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아시지만 다 방법이 있고 대책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내가 그 말씀을 당장 감당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그 말씀을 피하거나 그 말씀에 대해서 무관심해 지면 안됩니다. 그럴 때는 그저 꾸역 꾸역 말씀을 들어 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짐이 되어도 마음 속에 차곡 차곡 말씀을 담아 놓아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미리 담아 놓아야 꼭 필요할 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며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테네 사람들처럼 복음을 비웃거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일단 그들은 그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감당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복음 안에서 빛나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그래서 그 때부터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드디어 그 말씀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12절은 ‘귀부인과 남자들’ 중에서도 적잖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는데요. 이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예수믿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자면 떠나고 버려야 할 것이 많고, 그래서 말씀을 받기가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그 불편함과 부대낌을 참고서 말씀을 상고했고, 드디어 그 말씀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믿음과 영생을 보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직은 말씀을 감당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면 성령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그 말씀들을 가르쳐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꾸실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 말씀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여기 ‘진리 가운데’라는 말은 ‘진리 안으로’라고도 해석할 수 있고, ‘진리 안에서’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 바깥에 있을 때, 우리를 말씀 안으로 들어오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원래 말씀으로 지어졌고, 말씀을 따라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담이 에덴 동산을 떠나 에덴의 동쪽으로 갔던 것처럼 자꾸 말씀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결과는 뻔하지요. 거기에는 자유도 없고 왕노릇하며 사는 그럴 듯한 삶도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동안 열대어를 좀 기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아주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애지중지 돌보던 놈이 밤새 물 바깥으로 뛰쳐나와 방바닥에서 마른 멸치가 된 채로 발견되곤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난 인간은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됩니다. 그는 무한정의 자유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유를 누리며 그 자유 덕분에 더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그 자유에 질식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 바깥으로 나가면 얼른 우리를 말씀 안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말이지요. 제가 평신도 때, 저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뭘 저렇게 말씀, 말씀하시나 다른 말씀을 하실 말씀이 없나 싶어서 투덜거린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목사가 되어 보니 목사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유일한 교본인 성경이 말씀을 벗어나면 참 생명을 잃게 되니 말씀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또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말씀 밖에서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 성령님은 어떻게든 우리를 말씀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드십니다. 목자가 양을 몰아가듯 말씀의 지팡이로 우리가 말씀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 가시지요. 우리가 때로 이렇게 해도 거슬리고 또 저렇게 해도 불편해 지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의 길을 벗어난 그 곳에서 우리를 기다기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자꾸 말씀으로 우리를 귀찮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향치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가면서도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양들이지요. 양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양들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자꾸 말씀으로 우리를 귀찮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귀찮은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또 살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일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알아 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성령님께서는 늘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방식으로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4장 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러니,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절대로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라고 하면 뭔가 신비하고 독특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기만 하면 다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믿지요. 그 확신이 얼마나 강한지 그게 아닐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가는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신비하고 특별하다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라고 확실할 수는 없습니다. 뭔가 들은 것 같고, 또 본 것 같고, 또 확신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서 성령님의 인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안에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지요. 그러니,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감동되었다고 해서, 기도하고 어떤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밀어 붙이면 안됩니다. 그냥 따라가서도 안되고요. 그 경험이 강렬할수록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믿음 좋은 분이 기도하다가 “네 이빨을 뽑으면 다시 나게 해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답니다. 이 분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다음날 치과에 가서  정말로 이빨을 뽑았데요. 생이빨을 말이지요. 으… 생각만 해도 정말 아플 것 같은데요. 그러면 이 분의 치아가 다시 났을까요? 안타깝게도 다시 나지 않았습니다. 괜히 생이빨만 손해 본거죠. 이 분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유 없이 생이빨을 뽑으라고 하실 분이 아닌데 그걸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도록 말씀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온통 이 세상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출세와 부유함, 그리고 자기들의 조국인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일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이제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맞춰서 살아가라”고 외치셨지요. 그리고 수많은 이적들을 통해서 그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눈을 열어 하늘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를 꿈꾸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려고 성령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는 땅만 바라보면서 살던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게 되지요. 성령님께서 임했을 때, 성도들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시선과 삶의 중심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장래의 일,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심령에 적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로 만들고, 땅이 아니라 하늘 때문에 살아가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 나라 때문에 살아간다”고 고백할 수 있을만큼의 강력하고 분명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물어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시는 성도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적어도 성도라면 그 삶의 중심과 주된 관심만큼은 땅에서 하늘로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계속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낼 수 있는 힘을 내기가 너무나 힘드니까요. 그래서 저는 자주 저에게 주셨던 똑같은 은혜를 우리 성도들에게도 부어주셔서 무도들 하나님 나라에 붙들린 채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의 삶을 돌아보면 하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얻었을 때만큼 제 인생을 복되고 힘있게 바뀌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장래의 일을 알려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꿈꾸며 그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한 마지막 말씀을 일러 주시는데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는 14절 말씀은 13절에 나오는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라면 먼저 이런 방식으로 일하신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14장 10절로 되돌아 가보면 하나님을 보게 해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셨습니다. 그래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성령님도 똑같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기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고 또 그 말씀을 밝혀 주십니다. 그 말씀을 맛보여 주시지요. 그래야만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 영광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서 예수님을 기쁘게 섬기게 되니까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일하시는 곳에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령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신앙을 위한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으로 나의 믿음이 건강하고 괜찮은 믿음인지, 나의 신앙생활이 그래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요즘은 대부분 이것을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을 통해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사실 개인적인 경험이나 그런 경험이 만들어 내는 감정들은 우리 신앙을 평가하기 위한 참고자료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정적인 기준이 되기에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안에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더 높여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 또 실제로도 그것을 위해서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믿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해도 좋지요.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건강한 교회,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높임을 받습니다. 성도들도 그것을 좋아하고요. 성령충만한 교회는 자기 교회를 높이지 않고 예수님을 높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고 주님을 높입니다. 그 일을 즐거워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래서 성도와 교회가 그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높이도록 만드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예수님 대신에 오신 예수님 보다 나은 보혜사이십니다. 우리가 주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늘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말씀 밖에 있는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도록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을 더 기뻐하며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말이지요. 성령님은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예수님을 아는 기쁨으로 채워 주십니다. 늘 보혜사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님 안에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얻는 이 큰 복을 놓치지 마시고요. 우리 모두에게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령님,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를 늘 말씀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말씀 안에서 인도해 주옵소서. 
  2. 성령님,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소서. 우리 삶과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이 높여지게 하소서. 
  3.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일주일간의 삶을 축복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