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

2020.2.16. 요한복음 13장 31-38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46)

 

 

 

날짜 :  2020년 2월 16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3장 31-38절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래서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셨지만 가룟 유다는 결국 바깥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빛과 사랑을 버리고 어둠과 배신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씀을 영광에 대한 말씀으로 바꿔서 들려주셨습니다. 영광과 십자가! 이 두 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절대로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없고, 이 세상 가장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가리키시면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십자가는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었는데요. 그게 너무나 확실하게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미래의 일이 아닌 과거의 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습관에 따라서 말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 이유는 십자가가 그 자체로 영광스럽고 찬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잔인하고 비참하고 부끄러운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십자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십자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충분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말이 떠오르십니까? 성경은 그 답을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이지요. 저는 예전에는 하나님이 진짜로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에게 제일 중요하다, 아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생각하곤 했지요. 그런데, 제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계속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얻게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사랑의 증거였으니까요.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는 우리가 흘려야 할 피여야 했고, 십자가의 수치는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지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십자가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신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십자가가 예수님의 죽음이 되고, 그 죽음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갈라놓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적지 않은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잠시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너희를 정말로 떠나게 될텐데,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게 현실이 될 겁니다. 일은 이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분명히 알아 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알고 당하면 힘은 들어도 훨씬 덜 힘들테니까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늘 우리를 말씀을 통해 준비시켜 주십니다. 알려 주시고 믿게 하셔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너무 많이 힘들어 하지 않도록 해 주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 놓아야 합니다. 저는 요즘 그런 말씀들의 능력을 톡톡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시는 말씀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붙들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저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이 요동치지 않고 지켜지고 있으며 행동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지금부터 제자들이 겪게 될 일들을 알려주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정말 아름답고 복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엉뚱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과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길을 떠나면서 자기 아들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너 아빠 없을 때 정말 힘들고 급한 일이 생기면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왼쪽 구석에 있는 갈색 상자를 열어 봐라. 꼭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이지요. 아빠은 왜 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거기 비상시를 대비해서 적지 않은 비상금을 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무리 예수님을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고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당황스럽고 두려운 상황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지요? 제자들은 그럴 때를 대비해서 예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방법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면 제자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가 숨겨놓은 비상금과도 같은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 예수님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부로 알고 살았던 제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엄청난 난관이고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계속 예수님만 찾는다면, 그리고 왜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셨는가 하는 문제에만 몰두하게 되면 제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점점 더 불안해 질 것입니다. 지쳐갈 테고요. 제자들의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 공동체는 깨지게 되고, 있던 믿음마저도 다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며,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우선 그 공동체가 그들을 지켜 주는 울타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이 사람이 흔들릴 때 저 사람이 붙잡아주고, 저 사람이 넘어지면 저 사람이 다시 일으켜 세워줄테니까요. 그렇게 성도들의 믿음은 지켜지고 공동체는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랍게도 그 사랑 안에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통해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시는 곳에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교회는 그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보다도 고난과 환란에 강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작은 시험에도 휘청거리고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때로는 정말 그 때 그런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나 싶을 정도로 별 것 아닌 일 때문에 교회가 깨지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일이 생기고 상황이 안좋아지면 저절로 예민해지고 공격적이 됩니다. 자기를 지켜야 하니까요. 성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일이 생기면 자꾸 누가 잘못했느니, 누구의 책임이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느니 하면서 서로에게 날선 눈길을 보내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늘 변하지 않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며 살다가 보니 우리도 모르게 서로에게 너무나 날카로운 옳고 그름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거칠고 날카롭고 아프게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자기를 살피는 일에는 그렇게 게으르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정말 별 것 아닌 것들이 때로는 너무나 쉽게 교회에 큰 상처와 균열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그래서 입니다. 우리가 함께 신앙을 지켜가며 가꿔가야 하는 환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 사랑이 없이는 믿음을 지키고 공동체를 제대로 지켜내기가 어려우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우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이지요. 

사랑은 우리를 지켜 줍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고 공동체를 붙들어 주지요. 무엇보다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며, 우리 안에 사랑으로 계신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일이 좋은 일이고 서로 사랑하는 일은 더더욱 좋은 일이지만, 이 좋은 사랑이 때로는 죽기보다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정말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상하고 악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교회 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고요. 그런 분들을 가만히 묵상하고 있으면 그 분들은 정말 우리를 사랑에 좌절하게 만들기 위해서 특별히 부름받은 사람들 같습니다. 제가 지금 사랑하라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말씀을 만나면 제일 고통스러워지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 저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무난한 사람들,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그런 분들을 사랑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보면 편안하고 좋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섬기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고요. 나는 왜 이렇게 사랑하는 일에 더딘지, 나에게는 왜 이렇게 사랑하는 일이 힘겨운지, 왜 나는 여전히 진짜로 섬겨야 할 사람들은 앞에서는 낮아지지 못하며, 진짜로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하는지…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대면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깊이 숨겨 놓았던 ‘사랑하라’는 이 묵은 숙제가 제 마음을 치고 들어와 한 동안 멍하니 그저 말씀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연신 주님만 부르면서 말이지요. 이 말씀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정말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씀 속에서 저의 오래된 숙제만 다시 보게되었을 뿐 아니라, 감사하게도 이 숙제를 풀 수 있는 두 가지 힌트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힌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너무 힘들거나,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절망하게 될 때,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고, 지금까지 우리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기억하고 그것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슴 깊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 사랑 붙들고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은 본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 때문에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말씀을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그리고 지금까지 변함 없이 사랑하고 계신 것은 우리가 주님의 그런 사랑을 받을만큼 충분히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팔아 먹을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버릴 제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할 줄 다 알고 계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때와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우리들도 버림받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에 그렇게 인색했던 것은 우리가 그만큼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일에 게으르고 무관심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아는만큼 커지고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살면서 자주 자주 그 동안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사랑의 능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첫번째 힌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었다면 두번째 힌트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에게는 이 말씀이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거든 그 때는 다른 생각말고 그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 생각하고 사랑하기만 하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아마 주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고 원수들을 사랑하기가 쉬우셨겠습니까?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셨습니다. 유다를 사랑하셨고 베드로를 사랑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메단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약 이유를 찾으려고 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수만가지 이유를 찾아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그저 사랑하기로 하셨고, 그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에만 집중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양원 목사님을 아실 겁니다. 제가 신대원에 다닐 때, 숙제가 있어서 그 분의 따님이 지으신 그 분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저는 그 책을 읽다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여순반란사건 때, 한 명의 폭도에게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 폭도를 자기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그 아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사랑의 원자탄 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책의 다른 곳을 읽다가 그 분이 그런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자기가 사랑이 많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자기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이지요. 그 분께는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서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려고 애쓰면 되지요. 그저 서로 조금이라도 더 용서하고 조금이라도 더 섬기려고 애쓰면 됩니다. 100퍼센트 사랑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내 마음에 흡족하게 사랑할 수 없어도 상관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감정이 생기지 않아도 되지요. 그저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안되면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그 길을 걷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우리 마음에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심겨질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도 그만큼 더 온전해 질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말씀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것이 세상에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 주셨듯이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무엇일까요? 모든 소명의 근본이 되는 소명은 무엇이지요?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뭘 해도 세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은 성도와 교회의 생존방식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고, 교회는 더 든든하게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성도와 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소명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주님 없이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다른 말씀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을 살게 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랑하려면 자기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딜렘마이지요.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으로 자신을 부요하게 하며 그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원래 힘든 겁니다. 절대로 쉽지 않지요. 하지만 사랑만큼 힘이 세고 사랑만큼 값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귀한 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더 용서하고 더 섬기십시다. 서로 사랑하라신 예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여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생각과 마음을 접고 단순하게 그저 한 번 더 섬기고 한 번 더 용서해 보십시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하며 사랑의 능력과 부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살아가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벅차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1. 먼저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교회 식구들 중에 사랑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든 지체가 있을 겁니다. 딱 한 사람만 생각하시고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2.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합시다. 서로 사랑함으로 크고 작은 시험과 어려움을 함께 이겨가게 하소서.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 주님을 세상에 자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