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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104.04.08. 새벽예배 -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사순절 6-2)



15. 막1403to09 -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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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14장 03-09절




제가 전에 어떤 성도 한 분을 심방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이 이상하게도 들어가면서 종이며 고물이며 도저히 발 디딜 틈이 없이 들어차 있어서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함께 세들어 사는 한 남자 분이 폐지를 수집하는데 내다 팔지는 않게 계속 가져다 쌓기만 해서 집안 꼴이 그렇게 되었다고 굉장히 속상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얼마나 저런 더러운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손도 대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남자분에게는 함께 사는 이웃보다도 썩어가는 폐지와 더러운 고물들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놓은 마음 속에 있는 목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선순위 목록은 거기 포함되어 있는 것들도 그렇지만 그 순서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것은 이 우선순위라는 것이 굉장히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저렇게 소중하게 생각할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물론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도 있고 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땅히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을 가치 없게 여기고 또 가치 없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그야 말로 그 사람의 가치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또 목격하는 혼란과 어려움들은 이러한 가치체계가 뒤엉킬 때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들은 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모두 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그 순서를 잘 지키며 살아갔을텐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이 세상은 항상 무질서와 혼돈이 있고 그로 인한 혼란과 고통이 있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 입니다. 너무 너무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야기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 속에도 심각한 갈등과 멸시가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가치체계와 우선순위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집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순전한 나드향유 한 병을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여인의 행동에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전혀 나무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을 비롯한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평상시의 예수님 답지 않은 반응 때문에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누누히 말씀해 오셨고, 또 굉장히 검소한 생활을 해 오셨는데, 그 날 여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예수님의 평상시의 말씀이나 삶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여인을 책망하며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그 때는 유월절 직전이었고 유대인들은 명절에는 유독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을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에 더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백 번 맞는 이야기였죠. 그 비싼 것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먹일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사용하면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 가치를 이런 식으로는 전혀 평가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사랑하고 또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의 표현은 금전적인 가치로 바꿔서 값을 매길 수가 없고, 또 그렇게 값을 매겨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 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을 값을 매기려고 하였고 그래서 여인의 행동을 정말 쓸데 없고 가치 없는 “낭비”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을 여인에게 강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그 여인에게도 낭비였을까요? 전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여인은 더 가치있는 것이 그 여인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주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 있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아까워 하거나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 모였던 그 사람들과 여인이 그렇게 달랐던 이유는 그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귀한 존재, 더 사랑하는 대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매긴 가치는 과연 이 여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주관적인 것이었을까요? 다른 사람은 전혀 동의할 필요가 없는 그런 가치평가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그 어떤 것,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가치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의 창조주 이시고 왕이시며, 온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예수님을 온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그 분께 완전히 반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지혜는 또 어떻습니까? 그 분 자신이 진리입니다. 온 우주와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그것에 따라 움직여 가야 하는 진리입니다. 또 예수님은 그 분과 만나기만 하면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의 삶을 통째로 변화시키며 그에게 다른 것을 통해서는 전혀 얻을 수 없는 풍성한 삶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면에서 보든 이 세상에 이런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보다도 더 가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그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그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께 너무 너무 정확하게 어울리는 그런 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만이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았듯이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그 여인의 행동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정확하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물론 그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 험악하고 거친 죽음에 유일하게 향기를 더해 준 그런 값진 행동으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 여인의 행동과 하나로 묶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이 여인의 이야기도 전해지도록 그렇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행동을 그만큼 가치있는 행동으로 평가하셨고, 또 이 여인의 행동이 기억되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사실 이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굉장히 닮아 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았듯이 예수님 또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그 옥합에서 흘러 나온 향유의 향기가 예수님의 죽음을 덮어 향기롭게 해 주었듯이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보혈은 우리의 죽음을 덮어 향기로운 새 생명이 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로 묶어도 좋을만한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그 분의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며 또 하늘나라를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또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 들, 그것이 과한 것이 되고, 또 낭비가 될 수 있을까요? 참된 신앙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고 그래서 그 분을 진실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결코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더 이상은 안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항상 부족하기만 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무엇이든 드리는 것을 더 귀하고 기쁘게 여깁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이 여인의 마음을 닮은 그런 진심이 담긴 마음이 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해도 과하다 하지 않으며 무엇을 드려도 지나치지 않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낭비를 즐거워 하는 주님을 향한 가장 행복한 드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