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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1부예배 4.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일 :  2012년 3월 25일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5장 20-24절, 31-32절


 

도입 :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인가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강의를 듣기 전에 그저 제가 가진 신앙의 확실함은 그저 성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믿었던 것이죠. 제 개인적으로는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성경은 어쨋든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신앙의 참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저에게는 정말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강의였습니다. 

그 강의의 내용을 조금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지구상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가 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인간을 초월해서 신의 세계에 뛰어들든지, 아니면 신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목표로 삼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힌두교도 그렇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뉴에이지도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로 인간이 신이 된다고 하거나 혹은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나 시도를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가장 큰 죄라고 규정합니다. 또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비록 겉으로는 욕망을 통제하고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기 때문에 권장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가장 교만한 욕망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합니다.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지식을 더 많이 가지고, 또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신의 힘’을 가지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신이 되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의 그러한 욕심을 정당화해주거나 그 욕심을 채워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자연상태의 인간의 본능을 심각하게 망가져 버린 것으로 규정하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잘 다스리고 또 하나님께 복종시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가 한 편에 있고 나머지 종교들은 모두 반대편 쪽에 있는 그림이 됩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주장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기독교만 진짜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이든지 혹은 나머지는 모두 진짜이고 기독교만 가짜이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편 진영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 모두가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래서 모든 종교들 중에 한 가지만이 진짜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진리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제외한 모든 신앙은 다 한 편이고 또 한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신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제외한 모든 종교가 원래는 다 하나에서,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왔으니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죄라고 이야기하는 그 욕망과 죄를 오히려 구원이라고 말하며 그 방법까지 알려주면서 당당하게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신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신이 되라’라고 하는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어디선가 많이 보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맨 처음 시작부분에서 이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태초에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꼬득일 때 그들의 귀에 속삭였던 바로 그 속삭임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이러한 사탄의 속삭임을 구원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그들 모두가 다 한 뿌리에서 나온 그릇된 것들임을 알게 해 줍니다.  

왜 기독교 신앙이 쉽지 않은가?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신앙의 길로 들어 오지만, 막상 들어와서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마치 도덕교과서처럼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하지 말라고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기독교의 신앙 자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삶의 전제인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내려놓아야만, 적어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비로소 가능해 지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이 신이 되려는 욕망과 시도는 아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후에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가 남겨놓은 우리를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엄청나게 강한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며, 또 자기 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우리 속에서는 항상 그런 욕망들이 꿈틀대기 마련이며 또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가 사탄의 시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모두 이런 유혹들이 모양을 바꾸어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이미 신앙의 길로 들어온 후에는 이런 사탄의 시험과 유혹은 더욱 더 집요하고 교묘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은 바로 이러한 숨겨진 유혹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에 대한 오해

우리는 지난 두 주일 동안 ‘탕자의 비유’ 속에 나오는 동생과 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겉으로는 굉장히 대조적이었습니다. 동생은 글자 그대로 탕자였습니다.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럴 능력도 자원도 없으면서 혼자서 풍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형이나 아버지조차도 버리고 떠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반면에 형은 아주 모범적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이라면 한마디도 어기지 않았고, 집안 일이라면 열 일을 제치고 성실하게 해 냈습니다. 완벽한 아들로 나무랄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아들은 드러나는 모습은 완전히 달랐어도 아버지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참된 아들의 자리에서 살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게다가 이 두 아들은 서로 형제다운 형제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동생은 형제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형은 그런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선하고 인자한 아버지에게서 이런 두 아들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지만 비유는 우리에게 그런 ‘가정’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대개 탕자와 그 탕자의 회개에 초점을 두고 읽혀지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탕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를 말하며,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첫째 아들은 믿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들을 말하구요. 이러한 설명 중에서 두 가지는 맞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신 것이 분명하고, 첫째 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틀립니다. 첫째 이 비유의 중심에는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둘째 아들 또한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다. 

첫째 아들이든 둘째 아들이든 모두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든 아니면 죄인과 세리든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에 속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고 교회 안의 성도들이 됩니다. 우리 눈에는 첫째 아들은 항상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랐고 또 집안 일을 돌보았기 때문에 그는 신자이고, 둘째 아들은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떠나서 죄만 지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불신자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예수님은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둘 다 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까 꼭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도 참된 아들로 살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러니까 참된 성도로 살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보면 이 두 아들들은 겉모습만 달랐지 실제로는 모두 아들이면서 아들이 아니었던 그런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이면서 참된 성도의 자리에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오해는 그 때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해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규칙 벌레, 율법 벌레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형식적으로만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들은 정말 정성을 다하여 목숨처럼 여기며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남김없이 지켰습니다. 곡식 뿐만 아니라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 기도하고, 불의, 토색, 간음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정확하게 규례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멋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이것이 가장 자존심상하고 불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 아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를 의지하려는 결코 완전히 끊어버릴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은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때로는 둘째 아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첫째 아들의 모습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지혜와 힘과 소유를 자원으로 삼아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며 동경합니다. ‘긍정의 힘’이나 혹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 불리는 것들이 얼마나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지 알지 못하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을, 그것도 뒤쪽에만 강조를 실어서 인생의 표어로 삼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있는 둘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정반대의 모습, 그러니까 첫째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습니다.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예배란 예배는 모두 참석합니다. 십일조도 하고 구제도 합니다. 교회의 필요도 정말 열심히 섬깁니다. 이런 것 자체가 전혀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너무나 모범적이고 칭찬할만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하고 또 그것으로 인정받고 칭찬받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만 못한 사람들,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못 견뎌 합니다. 그런 사람들 또한 자신과 꼭같은 성도들이며 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때로 자기만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 큰 인정과 복을 받는 것을 보면 그 부당함에 억울해 하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있는 첫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 쪽은 신앙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지만 한 쪽은 세속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내용상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한 쪽에서는 눈에 보이는 탑을 쌓으려는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탑을 쌓으려고 한다는 것만 다를 뿐, 한쪽에서는 물질적인 면에서 자립을 추구하고 한쪽에서는 자기 의와 자기만족을 추구한다는 것만 다를 뿐 하나님 앞에서의 그 근본적인 삶의 원리와 태도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두 아들이 얻는 결과도 똑같습니다. 신자이면서도 참으로 복된 신자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그 자녀만 아는 자녀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참된 복도, 자유와  풍성함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아버지를 떠난 아들들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또 다른 사람들은 저런 면에서 궁핍한 삶을 살아갑니다. 

참된 아들의 복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참된 복과 풍성함을 누리며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또 신앙의 중심으로 삼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짜 복은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니며, 그 복은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성도나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있어서는 그 복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복은 참된 아들, 참된 자녀들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그런 복입니다. 하나님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복입니다. 그 복은 바로 ‘우리 영혼의 풍성함과 만족’이라는 복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그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강’이라는 복이고, 우리로 하여금 ‘결코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않게 해 주는 그런 복’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은 단순한 마음의 위로나 막연한 소망과 혼동하지만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은 그렇게 혼동하기 때문에 신앙의 참된 복을 놓치고 있기도 합니다. 나도 이미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의 삶 속에서 이 풍성함과 만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예를 찾아보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일화는 종교개혁 당시 프랑스의 개신교도였던 위그노 중 마리 듀란트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17세기 말엽 프랑스 남부에 메리 듀란트라는 소녀가 위그노 이단에 속했다는 죄목으로 당국자들 앞에 끌려왔다. 그 소녀는 열 네 살이었고 총명하고 매력적이었으며 결혼할 수 있는 연령이었다. 그녀는 위그노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저 신앙을 부인하겠다는 말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 소녀는 그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30명의 위그노 여인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녀의 수감은 38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감옥 벽에 단 하나의 단어를 새겨놓았다. 그것은 ‘인내’라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아직도 감옥의 벽에 새겨져 있어서 관광객을 놀라게 한다. ... 우리는 신앙의 헌신에 담겨있는 무서운 단순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헌신은 시간으로부터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내일이 되면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일시적인 소망을 양분으로 삼지 않는 그런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30명의 동료들과 감옥 속에 앉아 낮이 밤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을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서서히 몸이 쇄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부가 건조해지고 주름이 생기며 근육이 이완되고 관절이 뻣뻣해지고 감각들은 무뎌졌다. 기다리거나 인내하는 능력이 없는 세대에게는 이렇게 참고 견디는 모습이 비상식적이고 바보스럽게 보일 것이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이 삽 십 명을, 특히 14세의 이 평범한 소녀를 변절하지 않고 38년동안이나 넉넉히 견디게 했을까요? 무엇이 옆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 믿음을 지키게 해 주었을까요? 우리는 책이나 혹은 설교를 통해 앞서간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감동이 단순히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감동에서 멈춘다면 우리에게는 그다지 큰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들로부터 참된 유익을 얻으려면 그런 일이 가능하게 했던 진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저는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신앙의 위인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과연 억지로 그렇게 했던 것일까,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억지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그들이 결코 억지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끝까지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억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무척 큰 유혹과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순간 순간들은 정말 견디기 불가능할 정도로 괴로울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억지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들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있었고, 바로 그 능력으로 그 불가능한 삶을 넉넉히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이 환하게 빛났던 스데반 집사처럼 그 순간에도 그들을 만족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그런 특별한 복이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복은 허락되어 있다, 호두를 놓아버려라!

지난 주일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생과 포기만을 요구하시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이 우리가 더 깊고 풍성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며 진짜 자녀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원숭이 한 마리가 입구가 좁은 항아리 속의 호두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입구가 너무 좁아서 그 호두를 잡은 손을 풀지 않으면 결코 손을 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 항아리 밖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유가 있으며 다른 더 좋은 먹이들을 먹을 무한한 기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숭이가 그런 것들보다 호두를 더 사랑한다면, 그래서 끝까지 그 호두를 고집한다면, 그 원숭이는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넉넉하고 좋은 것들을 얻을 기회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려놓으시라고 하시는 것, 포기하라고 하시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삶의 방식은 바로 이 원숭이 손에 쥐어진 호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참된 자유도, 아버지 안의 풍성함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호두를 잡은 손을 풀어버리라고, 그 호두를 놓아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분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라 불리는 자리, 신자라 불리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큰 아들일 수도 있고, 작은 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둘 모두의 모습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것들을 붙들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이 큰 아들처럼 또 작은 아들처럼 우리의 삶과 영혼을 만족을 모르는 궁핍한 상태에 있도록 붙잡아 놓기 때문입니다. 그 호두 한 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할 것이라는 말은 사탄의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도, 그리고 우리의 돌이킴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속에 있는 큰 아들, 그리고 작은 아들과 싸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놓기를 힘들어 하는 그것이  원숭이 손의 호두라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고 그 움켜쥐었던 손을 펴야 합니다. 그 호두를 완전히 놓아 버리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붙들어야 합니다. 내 능력과 나의 의가 아니라 하늘의 모든 부요함의 주인이신 그 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모든 의를 이루신 그 분의 그 풍성하시고 넉넉하신 손을 붙들고 그 손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 참 자녀의 자리로 가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냥 예수믿지 마십시오. 기왕에 예수를 믿을 거라면 참 아들의 자리, 참 자녀의 자리까지 가셔야 합니다. 내 능력과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그 풍성하심과 다함 없는 사랑에 의지해서 믿고 살아가는 그 자리까지 가셔야 합니다. 우리 손 안의 호두로는 결코 우리 배를 불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손 안의 호두 한 알, 그 부족하기만한 호두 한 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식탁에서 마음껏 배불리십시오.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둘째 아들이든 첫째 아들이든 돌아만 오라고, 비어있는 참된 아들의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가장 영광스러운 옷을 입히고, 아들의 반지를 끼워주겠다고, 함께 하시며 나의 것을 다 너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어서 들어와서 이 잔치를 함께 즐거워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기쁨, 이미 허락된 하나님의 이 풍성한 기쁨을 놓치지 마십시오. 자녀가 누려야 마땅한 그 풍성한 만족과 기쁨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누려야할 모든 믿음의 특권과 능력은 다 이 속에 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은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한 걸음, 한 걸음 이 복된 자리로 나아가서 그 분만 주시는 그 비밀스러운 복과 만족을 누리는 참된 자녀들로 살게 해 주시기를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