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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112년 3월 1부예배 3.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일 :  2012년 3월 18일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5장 25-32절


 

도입 : 설교자의 노파심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노파심이라는 게 생긴다고들 하지만, 설교자들은 나이를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아도 노파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직업병 중의 하나인 것 같은데요. 그 노파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를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말합니다. 저는 ‘아’라고 말했는데, 청중들은 ‘어’라고 알아듣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탕자의 비유’의 앞부분을 함께 묵상하면서, 세상의 궁핍함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부요하심과 풍성하심에 의지해서 살자, 그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자는 메세지를 전해드렸습니다. 설교를 한 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성도들 중에서 또 이 말씀을 오해하고 곡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자의 노파심이 또 발동된 것이죠.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찾아와 “나에게 천 만원만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이야기를 황당하게 생각할 것이고, 또 만약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굉장히 영향력이 큰 사람이어서 그 돈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라면 내놓기는 내놓겠지만 아주 힘들게 내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아주 신뢰할 수 있는 투자의 전문가이고 내가 재산관리를 의뢰한 사람이라면 “나에게 천 만원만 주시오”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천 만원이 아니라 될 수 있는대로 더 많이 주려고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대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설교, 그러니까 지난 주일 아침에 드린 말씀의 예를 따른다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자. 세상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자”라는 것과 같은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또 어려운 걸 요구하는구나. 하기 힘든 것을 하라는 구나. 또 포기하라고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기뻐하기 보다는 부담스러워하게 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 아침 설교를 들으시면서 기쁘셨습니까? 아니면 부담스러우셨습니까? 만약 부담스럽게 느끼셨다면,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저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여러분은 지난 주일 아침 설교를 오해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포기나 희생을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뭔가를 내려놓으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에게 정말로 풍성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길, 영원히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린 것입니다. 그냥 억지로 천만원을 내놓으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천만원을 여러분의 실패없는 투자금으로 투자하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설교는 그래서 여러분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올바를 뿐만 아니라 복된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설교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앞으로 듣게 될 모든 설교를 그렇게 이해하시고 거기 순종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여러분은 영원히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첫째 아들이다

지난 주일에는 한 아버지의 두 아들 중에서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첫째 아들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얼마나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는지모릅니다. 말 그대로 불철주야 가정을 돌봅니다. 동생이 무책임하게 나돌아 다니기만 해도 첫째 아들은 자기가 해야할 일들,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묵묵히 감당해 냅니다. 얼마가 귀하고 장한 아들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이런 아들들만 존재한다면 정말 모든 가정은 아무런 문제 없이 든든할 것같습니다. 그런데, 모범생 아들이라고 해서,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이라고 해서 항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죠. 실제로 더 크고 심각한 문제는 이런 아들들에게서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남들이 보기에는 부럽기만 한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아주 뿌리깊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비극 1. 첫째 아들, 결코 아들로 살지 못하다

첫째 아들은 집과 농사 밖에 몰랐습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저녁 해거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고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날도 첫째 아들은 다른 날과 다름 없이 하루 종일 밭에만 있었습니다.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로 땀을 흘리며 농사에 몰두했습니다. 그나마 동생마저 완전히 집을 떠난 상태에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자신 밖에 남지 않았고, 또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안 농사를 성실하게 돌보는 일은 그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그래서 큰 아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을에서 왁짜지껄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음악소리,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였습니다. 어느 집에서 잔치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소리는 자기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잔치가 벌어질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문 앞에 서 있는 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그러자 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르셨어요? 둘째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다행히 건강하게 돌아오셨죠. 그래서 주인 어르신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이셨어요. 큰 도련님도 빨리 들어가세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큰 아들은 있는대로 화가 났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큰 아들의 이런 반응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집나갔던 동생이 돌아왔는데 기뻐하고 반가워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가족은, 특히 형은 부모와는 다릅니다. 부모보다는 동생에게 훨씬 냉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형입니다. 동생이 가산을 탕진하고 뻔뻔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형은 그 동생때문에 그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또 아버지는 동생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노심초사하며 침울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온 동생을 혼내기는 커녕 걸지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아주 좋은 형, 그저 선하기만 한 형이라면 몰라도 저처럼 조금은 못되고 또 냉정한 형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래야 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렇게 한참을 삐져있는데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큰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설득해 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도통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런 불만을 쏟아놓습니다. “저는 여러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는 커녕 염소새끼 한 마리도 저와 제 친구들을 위해서 잡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재산을 주색잡기로 날려버린 ‘당신의 이 아들(this son of yours)’이 돌아오니 아버지는 ‘그’를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어찌 이러실수가 있으십니까?”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집안을 생각해서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소식은 바로 그 아버지가 성실하게 아버지를 섬긴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마리 잡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기억나게 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그런 불합리한 차별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첫째 아들의 말은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첫째 아들의 수고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잘 섬길 수 있을까만 생각했고 최선을 다해서 가정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고민과 수고덕분에 둘째가 떠난 가정이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해 주고 또 칭찬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 아들의 말 속에서 굉장히 슬프고 일그러진 생각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를 달래려고 나왔을 때, 첫째 아들이 대뜸 꺼낸 이야기는 “난 수년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집안 일을 최선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위해서는 염소새끼도 내놓지 않았고, 잔치를 벌이지도 않았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흥분한 상태에서, 첫번째로 꺼내놓는 이야기는 대개는 가장 하고 싶어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이리 저리 듣기 좋게 돌려 이야기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아들의 이 말 속에는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명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라는 말이 그의 첫마디였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태도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큰 아들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또 그렇게 행동했던 동기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왜 첫째 아들은 한 번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라는대로만 했을까요? 그저 착해서, 너무나 순둥이여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아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래야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고,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들어간다면 그래야 아들다운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관계다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전통에서는 부모의 뜻을 받드는 ‘양명’을 효도의 가장 큰 덕목중의 하나로 봅니다. 또 우리나라의 부모자식관계, 특히 전통적인 부자지간의 관계는 개인적이기 보다는 상당히 공식적인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그 아버지를 기쁘게 하며, 또 아들다운 아들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잘못된 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자식관계에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고, 또 그래서 자격있는 자녀가 되는 것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부모자식지간은 절대로 공식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가족관계, 특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이런 비공식적인 관계에서는 누가 누구를 기쁘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는 조건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관계에 어울리는 사랑이 있느냐,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고 또 아들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저 아들이라는 사실, 자녀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이외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아들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행동으로는 그 어떤 아들보다도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이 되려고, 큰 아들의 자격을 갖추고 그래서 큰 아들이 받아야할 사랑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일꾼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은 적 없던 아버지가 전혀 자격없는 둘째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니 그게 그렇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근본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은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지, 자격을 갖추고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아들의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데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명을 단 한 번 어긴 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순종도, 몸을 아끼지 않고 집안 일을 돌보았던 그 귀중한 수고도 결코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아들의 섬김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비극 2. 동생의 형이 되지 못하다

그런데, 이러한 첫째 아들의 이러한 오해가 만들어낸 비극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만 망가뜨린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들됨과 아버지의 사랑을 자격을 갖추어야 얻을 수 있고 또 섬김에 대한 대가로 생각하는 큰 아들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둘째 아들은 절대로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고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둘째 아들은 더 이상 자기 동생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동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 아들”, 정확하게 번역하면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라고만 말합니다. 차라리 욕을 한다면, 거기에는 정과 사랑이 묻어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동생을 가리키면서 사용하는 단어들 속에는 형제지간의 관계나 걱정, 그리고 가족의 사랑은 없습니다. 첫째 아들에게는 둘째 아들이 그저 부당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 아버지의 아들일지는 몰라도 결코 자신의 동생일 수는 없는 어떤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첫째 아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들됨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를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과도 형제가 되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극의 이유 : 첫째 아들, 가진 것을 또 가지려고 하다

아버지는 그런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내 것이다. 하지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아버지는 항상 아버지로 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모두 아들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들이 되려고 했고, 또 더 사랑받을만한 자격을 갖추려고 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이미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큰 아들이 요청하기만 했다면, 큰 아들이 달라고 하기만 했다면 아버지는 주고 더 주었을 것입니다. 돌을 달라고 했다면 떡을 주었을 것이고 뱀을 달라고 했다면 생선을 주었을 것입니다. 송아지 한 마리가 아니라 암소 열마리라도 주어서 잔치를 벌이고 또 벌이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기뻐하고 또 기뻐했을 것입니다. 

성도여, 우리는 이미 그 분의 자녀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비교해서 가장 크게 다른 점과 차별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인격성’입니다. 인격성이야 말로 기독교를 기독교이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독교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격성이 빠져나가면 더 이상 그것은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인격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이다. 원래 우리 아버지셨지만 우리의 죄로 그 관계가 깨졌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다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내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싹 다 없애 버리고 다시 시작하신다고 한들, 이것 저것 귀챦은데 그냥 다 그만두어 버린들 그 분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분은 절대자유를 가지신 분이시고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은 그 분이 무에서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런 손쉬운 길을 놓아두고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며 우리를 다시 자녀로 삼으실 수 밖에 없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려고 그 분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영원히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이미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이런 사랑으로 이미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또 다시 자녀의 자격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또 사랑받을만한 조건을 덧붙일 필요나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자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를 돌보고 그 필요를 채우며 일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지, 그것을 통해서 자녀가 되고 사랑받을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딱 두 가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는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래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두 가지를 몰라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도 없었고, 동생의 형이 될 수도 없었으니 그 두 가지를 바로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가장 큰 복과 특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분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려고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보여지는 현실보다도 더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면 아버지의 함께하심의 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그 함께하심을 얻어내려고, 그 사랑을 쟁취하려고 애쓰며 살아가지만 결코 그 함께하심의 든든함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얻지못한 염소새끼 한마리에 연연하는 그런 삶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그래서 진정으로 아버지와 함께 거하게 될 때, 진정으로 그 함께있음을 누리기 시작할 때, 그 아버지의 모든 부요함과 풍성함도 비로소 우리와 상관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첫째 아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해도 그것을 알 수 없고, 또 그럴 때만 누릴 수 있는 풍성함과 부요함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결론 : 하나님의 아버지되어주심을 신뢰하며 진정 풍성한 삶으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첫번째 것만 확실히 붙들면 됩니다. 한 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둘째,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보다 먼저 첫번째 것을 확실히 붙드십시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진실로 믿으십시오. 거기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우리 삶과 신앙을 넉넉하고 풍성하게 해 줄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렇게 힘들어 하던 형제와 자매들을 넉넉하게 사랑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줄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시면서 다른 건 다 놓치시더라도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아버지의 함께 하심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마다 시마다 묵상하시고 그 은혜를 누리는 일에 실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우리 아버지의 약속에 여러분의 생각과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형제와 자매를 진실로 사랑하면서도 아버지께서 함께 해 주시는 그 넉넉한 기쁨을 놓치지 않는 회복된 첫째 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