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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913.05.05.주일오전 -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마가복음 28)


막0614to29 -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마가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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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14-29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어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르침, 이적, 병고침,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거절을 당하는 일까지 제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들과 부정적인 일들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실습을 내보내셨습니다. 그 실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받으며, 또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하나님의 공급해주시는 은혜에만 의지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도록 하는 실습이었습니다. 이 실습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실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중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이 항상 사용해야할 삶과 사역의 방법이자 원리가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둘 씩 짝지어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만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 입술에는 회개의 복음을 담고서 말입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자신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회개를 선포하자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와 능력 덕분이었지만 그들이 명하자 사람들을 사로잡아 꽁꽁 묶고 있었던 악한 영들이 떠나가 사람들이 치유와 자유를 얻었으며 병자들에게는 기름을 발라주자 그 병이 고쳐졌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이미 하늘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에 의지해서 힘차게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기도했을 때, 그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 모두 하늘나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 맡겨졌던 그 일들이 오늘날 교회에, 그리고 성도들에게 맡겨져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방법과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이 충분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것들에 의지하려고 든다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은혜에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물론 완전히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렇게 했는데 안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는 것이고,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공급해 주시는 것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워진 풍성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삶에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서나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지하려고 할 때, 우리의 삶과 섬김은 이 땅에 하늘나라를 닮은 곳을 넓혀가는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또 제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 방법은 지금도 효력이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삶을 보고, 교회를 볼 때 꼭 떠올려야 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했습니다. 꽤 오랫동안을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 일해서 예수님과 똑같은 일들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 덕분에 예수님의 이름이 만들어 내는 울림은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메아리는 결국 그 당시의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타파스의 귀에까지 들려졌습니다. 헤롯에게 이것은 위협이었고 공포였습니다. 그는 각료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신하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였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자기가 목 베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그럴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나 옛날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다시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자기가 목 베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헤롯은 비록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세례 요한을 죽였지만 그는 요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망령에 붙들려 있으면서 두려움과 가책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된 연유는 이랬습니다. 헤롯, 그러니까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인 헤롯대왕이 죽자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인 빌립이 아내인 헤로디아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의 율법의 기준에서보면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어쨋든 유대의 왕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헤로디아에게는 자신을 화려한 권좌에서 내쫓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고, 그래서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헤롯은 조금 입장이 달랐습니다. 비록 헤롯은 헤로디아를 위해서 요한을 잡아넣기는 했지만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했고 그의 말을 고민하면서도 달게 듣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의 생일이 찾아왔고 이 날 벌어졌던 술파티가 화근이 되었습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데 갑자기 헤로디아의 딸,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조카가 연회장으로 들어오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래서 헤롯도 덩달아서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내가 맹세한다. 무엇이든지 요구해 보아라. 내가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리라.” 아마도 손님들은 헤롯의 호탕함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헤롯에게 자기도 모르는 올가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무엇을 요구할지를 헤로디아와 의논했습니다. 헤로디아에게 이 기회는 정말 둘도 없는 기회였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헤로디아는 딸에게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 가져다 달라고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헤로디아의 딸은 엄마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 옮깁니다. 헤롯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양심이 없는 그였지만 그래도 세례 요한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맹세한 것과 자신이 맹세한 것을 들은 연회장의 하객들을 생각했습니다. 옳고 그름보다, 의로운 사람의 생명보다 자신의 맹세를, 그리고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시위병을 보내서 헤로디아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또한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의 생명은 이렇게 계집아이의 춤값으로 지불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허무합니다. 정말 화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그것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순결했던 자신의 종,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의 마지막이라면 누가 하나님께 충성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해서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례 요한의 허무한 마지막을 지켜볼 때, 이런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요한을 죽여놓고 헤롯은 계속해서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귀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회개를 외쳤고 하늘나라를 선포했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세례 요한의 일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그냥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으로 믿어버리고 맙니다. 비록 모든 힘과 권한을 쥐고 있던 것은 헤롯이었지만 헤롯은 그렇게 요한이 살아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세례 요한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읽는 우리들을 기분좋게 해 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상으로 볼 때, 이 이야기가 왜 여기에 나와야 하는지 그것도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차라리 13절과 30절을 곧바로 이어놓으면 이야기가 훨씬 부드러워지니까요.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당시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꼭 들려주어야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라는 주제가 그리 유쾌하거나 쉽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항상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의인은 성공해야 하고 상을 얻어야 하지 그 반대의 일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연속극을 보다가도 착한 주인공이 못된 사람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면 화를 내며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이 우리들이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그 연속극 같을 때가 많습니다. 착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손해를 보고 괴롭힘을 당하며 반대로 악인은 승승장구 합니다. 그러면 악인이 성공한 것이고 의인은 실패한 것일까요? 헤롯과 헤로디아는 성공한 것이고 세례 요한은 실패한 것일까요? 이 세상의 상식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 봤자 의롭게 사는 사람만 손해고, 세례 요한의 죽음은 가치없고 의미없는 허무한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상이 오로지 사람들만 존재하고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면 이러한 상식의 판단과 이야기가 전적으로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과 사람들의 상식이라는 차원이 아닌 또 다른 더 중요한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하늘나라라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자신을 보고, 또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 상식의 기준으로 보면 세례 요한은 실패자입니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억울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결코 실패자나 허무한 죽음을 당한 억울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영광을 누릴까요? 당연히 예수님이죠.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영광을 누리실까요? 물론 하나님이시니까 그렇지만, 거기에는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도 삶 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위한 가장 큰 댓가를 치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가장 큰 하늘영광을 누려야 마땅한 최고의 성공자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가장 많이 닮아있는 삶을 살았고, 예수님과 가장 많이 닮은 죽음을 죽었던 세례 요한이야말로 하늘나라의 기준으로는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개혁의 후손입니다. 종교개혁은 사실 무조건 옛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원래의 신앙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갔고, 성경 속에서 신앙의 원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회복시키고 또 지키려고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여러분도 ‘코람데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이 말은 그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이 붙들고 살았던, 그들 자신의 신앙의 원리이자 삶의 원리였으며, 성도들을 다시 원래의 신앙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외쳤던 신앙의 표어이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 교회의 신앙은 다분히 사람 앞에 서 있었고, 또 세상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기준에서 성공과 실패를 평가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타락시켰고 신앙을 망가뜨렸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속에서 이러한 타락의 원인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로 작정하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그들의 삶과 신앙 덕분에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원리 위에서 태어난 오늘날의 개혁교회는 애석하게도 다시 세상 앞의 종교, 사람 앞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회에 성공한다’는 말, ‘성공한 목회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목사는 목회에 성공해야 할까요? 성공한 목회자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을 성공한 목회자로 여기고, 또 어떤 목회를 하는 사람을 향해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라고 생각하며 이 말을 적용하고 있습니가? 만약 이 말을 저 시골이나 산골에서 겸손하고 기쁘게 목회하시는 목사님들, 힘들고 어려워도 성경적인 가치를 지키려고 애쓰며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에게 적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의 성공이 교회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말을 완전히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크리스챤’, 그리고 ‘크리스챤으로서의 성공’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할까요? 목회자의 성공을 세속적인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성도로서의 성공 또한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 또한 경제력과 명성을 기준으로,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겉모습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준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말입니다. 


원더걸스라는 유명한 걸그룹을 아시죠? 미국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한류스타 아이돌 그룹입니다. 이 그룹 중에 선예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선예양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동을 준비하던 중,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서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다시 선예양을 찾아오셨고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선예양은 그 때의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멋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냥 멋있는 분이라 표현하기엔 도저히 형용할수 없는 분이셨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분이 나를 위해 오신 구원자라는 사실이 믿어짐으로 인해 처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진리를 알게 됐습니다. 그 어떤 잘난 사람도 이 세상의 끝에 있는 죽음이라는 것을 해결할 수 없는데 예수님은 이미 2천년 전에 오셔서 핏값으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주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복음을 왜 내가 이제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선예는 거기서 참으로 복음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다시 만난 선예양은 그 복음을 자신만 알고 있으면 안된다는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다가 바쁜 와중에 기적같은 일주일을 휴가로 얻게 되었고, 무작정 개인적으로 아이티로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단기선교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선예양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그 선예양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루에도 정말 수십명 수백명씩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갔습니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런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마음이 더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아이티를 다녀온 이후로 하나님 앞에 제 삶을 드리기로 헌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것 때문에 부르셨구나, 이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고 하나님께서 나를 자랑하라고 주신 노래하는 달란트가 아니라 죽어가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라는 이유와 목적 때문에 주신 것이고 이곳까지 부르셨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새로운 인생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저 혼자 외롭게 걸어가지 말고 같이 걸어가라고 하나님의 완전한 타이밍에 배우자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결혼을 더욱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후에 선예 양은 아이티에서 만난 선교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아이돌 가수가 아닌 아이티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예양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티는 저의 첫 선교지이고 내년부터 아이티에서 선교하던 배우자와 아이티에서 살면서 사역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세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비전 때문에 자격도 없는 저를 불러주셨기에 이제는 원더걸스의 선예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민선예로서 전심으로(With all I am) 살아가겠습니다.” 


너무도 어렵게 얻은 얻은 아이돌스 타로서의 인기와 부, 명예, 그리고 화려함... 이것을 버리고 선교사로, 그것도 가장 가난한 나라의 선교사로, 선교사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 성도 여러분. 이것이 과연 성공을 버리고 실패를 선택한 것일까요?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을까요? 겉으로만 보면,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세상의 성공자들, 선예양처럼 아이돌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입장, 하늘나라의 시각에서 보면 선예양의 인생은 아마도 가장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가장 높은 자리, 자신이 그렇게 오르고 싶어했던 가장 화려한 자리를 가장 낮고 힘든 자리와  맞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창고에 들여놓았으니까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을 읽은 우리와 같은 성도들에게 참으로 가치있는 삶, 참으로 성공한 삶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누구의 기준에서, 누구의 눈으로 보기에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 줍니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세례 요한처럼 극단적이고 극적인 인생을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의 부르심이 다 다르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의 모습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인 성공과 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누구나 다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정말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행복으로 이어질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이 그 증거입니다. 물론 그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쨋든 갈릴리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가 정말 행복했을까요? 그가 자신이 얻은 것 속에서 진짜 평안을 찾았을까요? 그의 그의 기대대로 그것을 통해서 그의 명성은 정말 드높아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올랐지만 계속해서 탐욕에 불타올랐고, 자신이 죽인 요한의 망령하나 떨쳐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자신의 자리를 그다지 오래 유지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기껏해야 5년을 더 왕이 아닌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결국 로마에 의해서 귀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헤롯은 성공자입니다. 가장 큰 성공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공도 그를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했고, 그나마 그 껍데기 뿐인 성공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숫자와 규모가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 하는 가장 강력한 기준이 되어버린 땅 밖에 모르고 여기 이 세상 밖에 모르는 그런 세상에서, 온통 이 세상에 붙들려 버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과 사고방식에 물들어 가고 있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는 우리는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할 원래의 사고방식, 영원한 재판장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세상을 판단하시는 기준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수도 있고, 부자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화려한 인생을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을 평가하는 진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을 평가하는 진짜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 우리의 삶과 입술이 얼마나 두 분을 기쁘게 하느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참된 가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되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성공자가 되려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동안 두 분의 가치를 드높이며 살아야 하늘에서의 우리의 가치도 영원히 높아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또 앞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의 성공을 판가름 하려고 합니까? 우리는 세상의 눈 앞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앞에서,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이 참으로 영원히 가치있고, 그것만이 우리를 위한 참된 평가기준이 된다는 것을 믿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준이 아니라 이 믿음의 눈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보시고, 그 믿음의 눈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삶과 존재를 헤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평안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갈등과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하늘나라의 시각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성공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