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13. 새벽예배 - 너희도 미혹되었느냐(요한복음 52)


요0745to52 - 너희도 미혹되었느냐.pdf


20121113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7장 45-52절

자기 주관이 강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무기가 됩니다. 우선은 삶을 살아갈 때,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보다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에 의해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후회도 적고 훨씬 책임감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사가 양면성이 있듯이 자기주관은 그것이 큰 무기가 되는만큼 또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주관을 가지게 되는 확실한 근거가 없거나, 그 주관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일일 때는 주관이 강하다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대개 배운 것이 많고, 자신을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주관성의 함정에 빠지기가 더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인 데이타 위에서 정확한 판단력을 사용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며, 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오만함이 되어서 온전하고 바른 판단을 그르치기가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성전경찰들은 예수님을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성전경찰들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왜 그냥 왔느냐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성전경찰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들 또한 수없이 많은 가르침을 들으면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으니 당대의 유명한 율법선생들의 가르침도 많이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들어왔던 그 어떤 사람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예수님에게 손을 대고 억지로 끌고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말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더 화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크게 호통을 칩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 바리새인들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그리고 나서는 그들을 향해서 멸시의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너희들은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이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용기있게 그러나 아주 진중한 태도로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전에 예수님께 갔던 니고데모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율법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위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 사람을 재판하도록 되어 있습니까?” 이 말은 한 마디도 틀린 곳이 없는 율법 그대로였습니다. 율법은 현장범이 아니라면 사람을 그런 식으로 재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위를 알아보고, 그것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의 증언이 일치할 때만 거기 상응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의 말인 즉, 율법의 전문가요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어기려 들다니 말이 되느냐는 항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니고데모의 말로 인해서 치부를 드러내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편이냐, 예수의 편이냐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너도 그 사람 편이냐? 한 번 성경을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성경은 그저 그들의 논쟁과 갈등에 대해서 그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은 너무나 명확하고 자신있습니다. 아주 단호합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확신을 흔들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는 오만과 편견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결코 옳은 것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국의 소설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오만과 편견은 항상 쌍으로 다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만이 편견을 낳는 주범이기 때문이겠지요. 우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이 짧은 한 마디 속에는 그들이 얼마나 오만한 자들인가 하는 것, 그래서 얼마나 편견에 빠지기 쉬운 자들인가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들이 기준이고 자기들이 정답인데, 그것도 움직일 수 없는 기준이고 틀릴 수 없는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율법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자신들은 틀릴래야 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틀려도 자신들은 틀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근거없는 확신은 곧 바로 깨어져 나갑니다. 니고데모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조금 전에 율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성전경찰들을 저주한 그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 율법은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보고, 또 그 사람의 행동을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재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그들을 향한 엄청난 도전이고 또 내분이었습니다. 우선 니고데모의 등장으로 “바리새인과 당국자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느냐?”라는 그들의 말이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당시 공회원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7절 이하를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에는 그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적어도 권위있는 자기 집단 안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온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생각을 모든 사람의 생각과 동일시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러니 남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떡 줄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말입니다. 둘째로, 니고데모는 이 말로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가장 잘 지키는 자신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의 말 때문에 이들은 성전경찰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저주한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그들에게 폭탄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어?”라는 자신들에 대한 한마디 의문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그들은 또 하나의 편견을 거칠게 드러냅니다. “너도 예수 편이냐? 성경을 찾아봐라. 성경에는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한 적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이 말 또한 완전히 틀린 말이었습니다. 우선 이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이 갈릴리가 무척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둘째로는 이 말의 내용 또한 성경과는 다릅니다. 갈릴리 태생의 선지자는 둘이나 있습니다. 요나와 나훔이 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성경을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고, 또 외운대로 그대로 옮겨적는 일을 했던 그들이 그 기록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하게,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진리인 듯이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심리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 경향이 강하면 너무도 분명한 증거까지도 부인하게 되고, 반대로 전혀 근거 없는 것을 철석같이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는 싫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지지하는 모든 자료들과 증거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서 폐기처분해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편견은 이렇게 몰라서 생겨나는 편견이 아니라 알면서도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또 믿기 싫은 사람에 대한 거부감에서 나오는 편견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만은 편견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믿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편견에 빠지게 되고, 그 편견은 우리가 꼭 가야할 길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진짜 믿어야 할 것은 믿지 못하게 하고, 전혀 근거없고 믿으면 안되는 것들을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들을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내가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또 머리가 좋다고 하여도 나는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이리 저리 기울 수 있고, 그렇게 기울어진 것을 바른 것으로 믿을 수 있는, 그러느라고 바른 것을 기울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그 일에서 틀릴 수 있고, 내가 가장 잘 하고 있고, 또 제대로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일에서도 충분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관한 한,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믿어야 할 것을 믿고 있는지 그것을 항상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잘못되는 것 자체는 위험하지 않지만,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는 것은 영적으로 굉장히 위험합니다. 바로 그러한 위험이 오만으로부터 옵니다. 오만하면 편견이 생기고, 편견이 생기면 그 편견에 스스로 미혹됩니다. 그리고 미혹된 것일 수록 더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우리는 진리에 관한 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확신을 하더라도 겸손하게 확신해야 합니다. 항상 더 온전한 것, 더 올바른 것이 다가오면 이전의 것을 고치거나 바로잡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자리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구조선입니다. 확실하게 믿을수록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많이 알게될 수록 더 낮아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해 주실 것이고 더 확고하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항상 진리 앞에서 겸손하셔서 그 진리가 걸림돌이 되는 일을 예방할 줄 아는 지혜를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