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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14. 새벽예배 -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요한복음 53)


요0745to52 -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pdf


20121114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7장 45-52절


저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아무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이 대하는 것은 일반적인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반학문들은 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지만 목회자들은 성경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하나님과 영원한 것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합니다. 굉장히 묵직하고 또 모두가 다 변함이 없다고 믿어지는 것들이죠. 그리고 목회자들은 저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맞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신앙의 특성상 확신이 없는 것을 가르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는 모르면 안되고 틀리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있고 이런 것들이 깨질 때 굉장히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의 회의인 70인 공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그만큼 굉장한 전문성과 권위를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영생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왔다가 된통 꾸중만 듣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세워놓은 사람이 이것도 모르냐고,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르고 육의 일과 영의 일이 다르다는 기본적인 것 조차 몰라서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느냐고, 정말 덧셈 뺄샘을 모르는 초등학생이 선생님에게 답답한 꾸중을 듣듯이 그렇게 바닥까지 드러내면서 혼줄이 났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또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아마 니고데모는 ‘천하의 공회원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나중에 두고보자’라고 칼을 갈게 되었을 것입니다. 힘있고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대개가 그러니까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그렇게 된통 혼만나고 그냥 퇴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깨닫게 되었다든지,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든지 그런 후일담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졌던 니고데모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지금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공회원으로서의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전문성까지 내세우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이들은 마치 온 자신들이 온 세상의 중심인 양, 진리의 표준인 양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공회 안의 주도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간혹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가진 게 많을수록,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특히 함께 지키고 있는 특권이 있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 집단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세상이 되어주고 또 방패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입다물고 있는데, 주류를 거슬러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정직한 의견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되면 따돌림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 동안 자신의 방패요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사람들과 큰 틈이 벌어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그 집단에 속해 있는 한 그 집단의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러한 주류,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를 좌지우지하는 그 집단의 그 막강한 주류를 거스릅니다. 그 막강한 흐름을 혼자 막아섭니다. 물론 그가 직접 대놓고 예수님의 편을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그들이 함께 유지해 오던 큰 틀을 안에서 부터 깨뜨리는 이야기였고, 결국은 지금 공회가 한통속이 되어서 잡아 죽이려고 하는 예수님의 편을 드는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니고데모는 진리에 대한 큰 궁금증은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진리 때문에 이런 큰 모험을 할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3장으로 돌아가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시간을 ‘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그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는 진리를 좋아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밤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둠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영생의 문제를 물으러 왔지만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아무도 모르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을 보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 그의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이후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확실히 보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는 진리를 원하면서도 여전히 어둠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빛으로 나왔습니다. 낮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보다는 자신의 입장이나 체면이 더 앞서 있었지만 이제는 참된 율법을 지키고, 또 진리를 지키려고 자신의 전부를 걸만큼 확실하게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문가요 권위자로서 예수님께 엄청난 꾸중과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공회원들처럼 끝까지 자신의 권위나 입장, 그리고 자존심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느라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망신과 꾸중이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는 인도자 역할을 하도록 자신을 내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빛에 속한 사람답게 빛에 속해 있음을 스스로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진리가 우리 삶에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일으키게 되어 있는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여전히 어둠에 속해 있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 그리고 예수를 믿는 믿음보다도 내가 더 중요한 상태에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부터는 달라져야 하고 또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고 그래서 영생을 위한 진리를 알게 된 다음부터는 저울의 추가 내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또 내 의지와 계획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예수님을 위해, 또 진리를 위해 예전에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까지도 내려놓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드디어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으로 옮겨간 사람들, 어둠이 아니라 온전히 빛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니까 이제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섣부른 것이고, 엄밀하게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진짜 믿음이 있는가, 진짜 영생의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이 있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렇게 해라, 너에게 그런 것이 정말 중요하게 여겨지거든 꼭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된 후에, 적어도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게 된 이후에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상태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또 예수를 믿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나에게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던 경험이 있는지, 영생의 진리를 듣고 그것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기뻐했던 그런 경험이 있는지, 그래서 그런 경험들이 나의 삶을 그런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저 믿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완전히 옮겨가야 합니다. 나의 소유보다, 내 입장보다 내 체면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해지고 영생의 진리가 더 중요해지는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했다면 반드시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성경은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에게 너희가 진실로 예수를 만났다면 그렇게 변화되게 되어있다고, 어둠에 속한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빛으로 나아와서 빛에 거하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그동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드디어 어둠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천국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해야 합니다. 또 기도해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거듭남을 위해서 애쓰는 일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보여야 하고 또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인 고민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그럴만한 증거가 내 삶에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진리를 붙들고 고민하고 또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진리 때문에, 믿음 때문에 큰 것 하나 포기할 순간이 다가올 때, 주저 없이 진리 편에, 그리고 예수님 편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말할 것입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너도 예수님 편이냐?”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훈장이 될 것입니다. 비로소 어둠이 아니라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인증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저는 저의 위치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위치에서 니고데모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 속에 있는 거듭남의 모습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내 속사람의 모습을 살피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참된 거듭남을 위해서, 그 은혜와 증거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참으로 빛에 속한 사람, 거듭난 니고데모가 되어 오늘의 니고데모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