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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23. 새벽예배 -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요한복음 60)

   

요0901to07 -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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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요한복음 9장 01-07절


예수님께서는 돌로 자신을 치려는 유대인들을 피해서 성전에서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맹인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 그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을 보자 갑자기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나면서 부터 소경이 된 사람’ 이 사람이 왜 맹인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조금 그런 사고방식이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맹인이 되는 것처럼 큰 질병은 모두가 다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의 경우는 나면서 부터 맹인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그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또 그렇다고 당연히 부모들의 죄라고 여기기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나면서부터 저렇게 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사실 이 문제는 제자들이 알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였습니다. 안다고 어쩌겠습니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까? 아니면 그 눈을 고쳐주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 소경을 보자 마자 그 소경을 불쌍히 여기거나 그 아픔을 헤아리기 전에 그 질문부터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다른 사람의 뼈아픈 아픔을 앞에 놓고서도 그 사람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이런 질문부터 던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평생을 앞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렇게 구걸하며 연명하는 사람을 앞에 놓고 그 아픔이 죄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렇다면 그것이 누구의 죄인가 하는 것을 먼저 토론하려드는 그 냉정함과 무관심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한다. 밤이 올 것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이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본문은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 주제보다 사실 훨씬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 본문을 사람들의 질병이나 아픔을 대하는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수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는 그들 자신도 그 어려움의 이유를 알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 고통의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완전히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몰라도 결코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없는 우리는 그 모든 사람들의 모든 아픔의 이유를 절대로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함부로 ‘그러니까 그렇다’는 단정을 지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유 말고 더 깊고 중요하고 또 복잡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들 자체가 진짜 이유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관련해서는 이런 질문을 너무 쉽게 던져서는 안됩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그런 질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고 나중에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그 사람이 아니라 고통의 이유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있었던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에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왔지만, 너무 지나치게 도와주려다가 욥을 위로하는 대신 욥을 정죄하고 괴롭히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욥에게 욥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려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답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오히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 주려다가 그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기가 쉽습니다. 또 정답을 알려주려다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로 가게 될 때도 많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어보면 이런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여자 성도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일을 알게 된 일찍 혼자되신 교회의 노권사님 두 분이 그 여자성도를 찾아갔답니다. 자신도 일찍 홀로된 분들이시니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셨고, 또 자신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죠. 처음에는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저런 이야기로 위로를 해 주어도 그 성도가 계속 울기만 하자, 아마도 두 분 중의 한 분이 아마도 화가 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남편 죽은 일가지고 그렇게 까지 슬퍼하니 갑자기 그 성도에 대한 신앙적인 평가도 내려지게 되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우는 성도를 앞에 놓고 이렇게 꾸짖었답니다. “너만 남편이 죽었냐? 우리들도 다 죽었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위로입니까? 완전히 벗겨진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겪이죠.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를 하려고 하다가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아픈 사람은 평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곁에 있어주고, 할 수 있다면 함께 아파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하지만 실제로 우리들은 이 선을 잘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이 떠오르시거든 그 질문이 내가 해서는 안되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얼른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런 노력은 우리의 위로자로서의 역할을 망쳐버릴 뿐이니까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 아닌 답 속에서 우리는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한 우리의 바른 태도와 역할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여러분, 모든 인생은 전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인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 하나의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섭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온 우주,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속에서 그 사람의 인생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 엄청난 스케일 속의 그 세심한 섭리를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때로는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벌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넌지시 그저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멈춰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아니 나 자신의 인생이라도 그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 누구의 인생이라도 내가 끼어들어 콩나라 팥나라 할 수 없고, 재판관이 되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이것이 오지랖이 넓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신앙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저 ‘나는 그게 뭔지 모르지만 저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저 사람의 인생에 저런 일을 주신거야. 내 인생도 마찬가지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한다.” 요한복음에서 낮은 일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맡겨진 일을 할 수 있을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들이 그런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보면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어가 예수님에서 우리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해야합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그럴 때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치고 풀어주는 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들을 주님께서 하셨던  방식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평가자나 재판관으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돕고 회복시키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일들을 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거둬들이고 그 대신 ‘어떻게?’라고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진실로 도울 수 있을까, 저기서 건져주고, 또 회복시켜줄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아픔과 고난을 당하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이런 일들을 신중하게 생각해서 얻은 답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그대로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남의 아픔을 볼 때,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왜?’라고 묻기 전에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저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진실로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고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위로하고 그를 참으로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돕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 때에만 진정으로 돕는 자, 세우는 자, 함께 하는 자로서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항상 피조물의 자리, 그들의 위가 아닌 옆자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몫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칭찬받는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