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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05. 새벽예배 -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세기 76)



창2213to19 -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더라(창76).pdf


20131105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2장 13-19절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저에게는 참 많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준 행복이나 기쁨 말고도 저는 아이들과 저의 관계 안에서 저의 부모님의 저를 향한 마음을 알 수 있었고, 특히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자녀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비록 몇 천분의 일, 몇 만분의 일이겠지만 굉장히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 그것도 훨씬 가치가 없는 존재를 위해서 아들을 내놓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때,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그 마음의 크기에 압도되어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어느 정도는 형식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저의 신앙이 부족하나마 하나님을 향한 진심의 표현이 될 수 있었던 것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된 후, 저의 신앙은 그저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에게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힘겹게 헌신하며 해야만 했던 일들이 그 이후에는 그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을 위한 기쁜 수고가 되었으니까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겁고 힘든 일을 가볍게 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비결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수고는 그것이 쉽지 않을 때는 있어도 결코 억지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거기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어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면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이유가 없어도 충분히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쉽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도 그런 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결코  쉬운 순종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그야말로 쓰디 쓴 순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순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만큼 무겁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브라함은 그 때 아들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쏟아부어주신 은혜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증거하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고, 그래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사랑의 크기가 이삭을 향한 사랑의 크기보다도 더 컸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흔적은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이나 고생하면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의 삶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다른 곳에서 사역하였더라면 자녀들에게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한 혜택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렇게 자녀들을 궁핍하고 불편한 삶을 살게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정말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감수하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자 그것을 보시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후일에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아들도 아까지 않는 순종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아끼지 않는 사랑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크기를 증거하는 증거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고개를 드는 아브라함은 그 때까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뿔이 수풀에 걸려 버둥거리는 숫양 한 마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그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붙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뜻인데요, 이 말은 이미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제물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했던 대답 속에 들어 있는 말과 글자까지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미 모리아 산 위에 이삭 대신 제물로 쓸 숫 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고, 그것이 이삭대신 제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라는 말은 그야 말로 예언 아닌 예언이 되었고, 아브라함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삭 대신 사용할 제물을 미리 마련해 놓으셨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로 드려질 숫양을 미리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로 사용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우리가 죄를 짓고 난 이후에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에 아담을 만드시기 전에, 그리고 아담이 죄를 짓기도 전에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또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저 세상 한 구석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크게 관심같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서 영원 전에 당신의 아들을 대속물로 미리 준비하셨다니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헤아릴 수 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정말로 놀라운 이유는 이것 말고도 또 있습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삭보다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순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실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실까요? 당연히 예수님이죠. 하나님께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그 예수님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덜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을 속죄제물로 준비해 놓으셨다가 때가 되매 진짜로 십자가의 제단에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저는 사실 조금 당황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곧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해하려고 해야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 그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며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까요? 바로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속죄제물로 준비해 놓으셨던 그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들 준비해 놓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 분명히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한 모든 것, 그리고 우리 삶을 위한 모든 것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언제나 모든 것을 준비하실 하나님이시니까요.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항상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묵상하며 믿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 정말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변함없이 그렇게 해 주십니다. 항상 십자가를 통해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시며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하고 다함없는 사랑을 경험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