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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12. 새벽예배 -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들을 택하라(창세기 80)



창2401to09 -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8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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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4장 01-09절



한 세대가 끝나고 그 자녀들의 세대가 시작되는 때는 그 자녀들이 결혼을 하게될 때 일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모세대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결혼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제 아브라함의 시대가 끝나고 이삭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24장 1절은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물론 이 구절 속에는 아브라함이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드물게 장수의 복을 누렸고, 하나님께서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셔서 아브라함을 복이 되게 해 주시겠다던 약속을 지키셨다는 은혜로운 증언이 포함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에 대해서 “나이 많아 늙었고”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아브라함 또한 누구나 만나게 되는 때, 그러니까 자신의 세대를 마감하고 다음 세대로 바통을 넘겨주어야 할 때가 다가 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세대를 끝내고 다음 세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바로 이삭의 결혼 상대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가장 신임하는 종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삭의 아내가 될 처자를 찾아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상합니다. 그냥 아내를 구해 오라고 하면 되지 자신의 고향 여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꼭 고향 여인만 데리고 오겠다는 맹세까지 하게 합니다. 그 종이 혹시라도 아브라함 고향의 처자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려고 하면 그 때는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도 되겠느냐고 하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해올 것을 명하면서 제시한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은 가나안 사람이어서 안되고 자기 고향인 갈대아 우르 사람이어야 할 것. 그리고 두번째는 어떤 경우에도 이삭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지는 말 것.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는 가나안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단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땅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의 죄로 멸망당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멸하실 때 자신의 후손들 중에 가나안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으면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가나안은 이미 깊은 우상숭배와 심각한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을 사람은 가나안 사람들 중에서 나오면 안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첫번째 조건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두번째 조건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왜 자신의 아들이 자기 고향에 가는 것을 그렇게 철저하게 금했을까요? 다른 아버지 같으면 안 간다고 해도 가자고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명하신 것은 하나님이시구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그가 영적으로 고향을 완전히 떠난 것은 그렇게 몸이 고향을 떠난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하나님께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그 때에 이르러서야 그는 완전히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아브라함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약속에 땅에 아무런 미련이나 아쉬움 없이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결혼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떠나온 곳으로 되돌려 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결혼 때문에 이삭이 거기 눌러 앉게 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의 자기의 수고는 헛수고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먼저 예수를 믿은 믿음의 선배로서 부모가 자녀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고 난  후, 한참의 세월을 지나서야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믿음으로 시작하였지만 정말 말 그대로 꽤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의 신앙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믿자 마자 신앙을 굳건하게 붙드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동안 예수를 믿지 않고서 방황한 세월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별 열심이나 의미도 없이 신앙생활 했던 세월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이야 어떠했던 긴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온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부모로서 자녀들이 후일에 영적으로 볼 때 복잡해 질 수 있는 일을 선택하지 않도록 돕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은 편리하고 좋아 보이더라도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위험을 보고 그것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 해 주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그렇게 떠나기 힘들어 했던 그 자리로 가려고 하거나 혹은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할 때, 그 자리에 가지 못하도록 신앙적으로 지도하며 충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흐지부지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힘겹게 여기까지 온 자녀들의 부모들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일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할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지나고 보니 내가 이렇게 약속의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안다면, 우리가 책임은 지지 못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힘겹게 걸어온 이 길을 답습하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돕는 것이 믿는 부모의 가장 지혜로운 역할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선택을 하려고  할 때, 그렇게 열심히 말리면서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한다면 그것은 믿는 부모인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 직무유기를 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자녀 눈치 보지 마시고 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듣지 않을 때 듣지 않더라도 그것이 믿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꼭 해 주어야 할 역할이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으로 며느리감을 구하러 종을 보낸 것은 결코 아무런 근거 없이 고집스런 모험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절대로 고향으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도 현실적으로만 보면 그 먼 곳까지 가서 며느리감을 구하는 것보다는 가까이서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내린 영적이고 신앙적인 결단이었지만 동시에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억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만 큰 민족을 이루고, 그 후손에게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그 땅에서 며느리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모리아 산에서 ‘언제나 준비해 두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양을 준비해 놓으신 것 또한 이삭을 통해서만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그 말씀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준비해 놓지 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 하나 때문에 자신의 약속을 망가뜨리 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를 멸망당할 가나안 족속 중에서 준비해 놓으셨을 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로 가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준비해 놓으셨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종에게 맹세까지 시켜가면서 거기서만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신앙적으로 정직하고 바르게 지도하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과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위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확신, 항상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 말입니다. 이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이끌기가 쉽습니다. 현실은 항상 신앙과는 부딛힙니다. 신앙은 그것 자체로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 뿐만 아니라 현실의 주인이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결코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꼭 원하는 것을 주시지는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다른 방법으로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그렇게 인도해 오셨듯이 우리 자녀들의 삶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며, 현실이 아니라 신앙에 입각해서 조언하시고 지도하시는 자녀들의 영적인 리더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고, 이삭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항상 이 믿음으로 든든한 성도로 사시고, 또 자녀들의 영적인 리더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