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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20. 새벽예배 -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세기 85)


창2450to58 -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85).pdf


20131120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4장 50-58절


아브라함의 종으로부터 나홀 성까지 이삭의 부인이 될 사람을 구하러 온 일에 대한 자초지종을 듣고 난 라반과 브두엘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허락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보내는 일이 그들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반과 브두엘은 결혼의 허락여부를 정확하게 말해달라는 종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결정할 수 없노라” 대답만 보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 같지만 그렇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저 아브라함의 종이 여호와 하나님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나중에 이삭의 아들 야곱이 라반의 딸들을 데리고 나올 때, 라반이 자기 집 드라빔 우상을 가지고 갔다고 먼 길을 추격해서 왔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은 신앙의 고백이라기 보다는 이 결혼이 두 사람의 집안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유리한 결혼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두 사람은 리브가의 결혼을 200퍼센트 허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종은 이제 이 일을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서 두 사람의 집안에 더 많은 재물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날 밤은 결혼이 성사된 기념으로 커다란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먹고 마시고 융숭한 대접을 받은 종은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리브가의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만큼 궁금해 하고 있을 아브라함에게 빨리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라반과 리브가의 어머니는 그렇게 빨리 리브가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에게 왜 그렇게 빨리 가려고 하느냐고 한 10일쯤 더 머물면서 쉬고 나서 떠나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종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지체할수록 아브라함이 이 일에 대해서 그 진행과정을 궁금해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만류하지 말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다시 한 번 돌아가게 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문득 이 부분을 읽다가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자신이 아브라함을 섬기는 것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육신의 상전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물론 자신의 상전이 어떤 상전이냐에 따라서 그렇게 하기가 더 쉽기도 하고 반대로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자신의 윗 사람을 섬기는 그 일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정말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을 따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놀랍게도 우리는 항상 사람을 사랑하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해서는 항상 존중하는 태도, 그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위쪽에 속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도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위에 있는 권위에 순복하며, 또 그의 유익을 위해서 힘쓰는 것을 아름답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비록 그가 구약시대의 사람, 그것도 율법이 있기 이전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신약의 교훈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되고 진중한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사람의 원래의 성품과 가장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너무도 진지하게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겠다는 종을 그냥 거절할 수가 없어서 라반과 리브가의 어머니는 리브가를 불러서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리브가에게서 되돌아온 대답은 굉장히 매몰찬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주저하거나 아쉬워 하는 모습도 없이 그 질문을 듣자 마자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말로는 그저 가겠다는 일반적인 대답이지만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이 대답이 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강한 어조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아주 강력한 의지를 담아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표현방식이 따로 있는데  이 ‘가겠나이다’라는 대답이 바로 그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모습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사실은 훨씬 더 단호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모두 떠나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브라함과 같지만, 아브라함처럼 오랜 세월을 뭉기적 거리지 않고 곧 바로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면 리브가는 참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목마른 나그네를 위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동이를 내려 목축일 물을 주었고, 긴 여행에 지쳐 보이는 낙타들을 위해서 엄청난 양의 물을 긷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리브가가 우유부단하거나 머뭇거리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리브가는 자신이 결단한 일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단호함을 가지고 있기 도 했습니다. 대부분 이런 선한 마음과 단호한 마음은 공존하기가 쉽지 않은데, 리브가에는 그런 두 가지의 어찌보면 상반되는 마음을 다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리브가의 이런 단호함이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날 때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해서 ‘여자 아브라함’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은 이렇게 리브가가 그 성품으로 볼 때 아브라함과 사라의 뒤를 이어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받기에 충분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를 수록 예수믿는 일도 마냥 착하기만 한 성품 가지고는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그래서 약삭빠르고 영악해져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선한 마음과 더불어 바른 생각과 결단이 섰으면 그것을 따르는 단호함과 용기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때로는 매몰차게 보이더라도 자를 때는 자르고 떠날 때는 떠나야 합니다. 꼭 그래야 한다면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매몰차고 몰인정하게 보여질 지라도 예수를 제대로 잘 믿으려면 항상 언제든 또 누구에게든 자신의 단호한 의지와 뜻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듣는 사람들을 섭섭하게 하고, 나 자신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어도 아닌 것은 아니다, 맞는 것은 맞다고 이야기 해야할 때가 오면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깊게 배려하는 사랑 속에 그런 단호한 마음이 함께 들어 있어야 합니다. 꼭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그 누가 만류하고 방해한다고 해도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단호함과 분명함이 없으면 우리 신앙은 언제든지 옳지 않은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 타협하게 되고, 그래서 흐지부지한 신앙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부인이 될 사람을 구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아무래도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항상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마치 라반과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 머뭇거리게 만듭니다. 꼭 나쁜 것들만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이나 인간적인 정, 혹은 관례나 예의 같은 것들을 통해서도 전혀 악의가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런 것들을 거절하는 것이 무척 힘들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면 우리는 바르고 확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기 힘들어 집니다. 인간의 정과 상식, 예의 같은 것들은 챙길 수 있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내가 가야할 길로 가는 것은 방해를 받고 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처럼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신 분을 최고의 상전으로 섬기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리브가처럼 바른 뜻을 세웠다면 때로는 매몰차고 몰인정해 보여도 그렇게 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써 가시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자신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맞추고 뜻을 맞추셔서 “내가 가겠나이다”라고 말할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