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21. 새벽예배 -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창세기 86)



창2459to67 -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창86).pdf


20131121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4장 59-67절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옵니다. 우여곡절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치밀한 인도와 섭리,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보인 아브라함에 대한 신실한 충성과 리브가의 결단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방해하는 난관들을 넘어서 순적하게 이루어지고 좋은 열매로 맺혀지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걸맞게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조율해 갈 수 있는 사람들의 반응도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야 이루어지게 되어 있지만 사람의 이기심과 고집,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어리석음은 얼마든지 빠르게 갈 길을 멀리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영광을 빛바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리브가와 아브라함의 종을 만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리브가의 어머니와 오빠 라반은 리브가를 한껏 축복해서 보냅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놀랍게도 라반이 자기 여동생을 위해서 빌어준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셨던 복의 내용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리브가가 이삭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소명과 복을 물려받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나중에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어서 그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되었을 때, 리브가가 그 이야기 속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의 내용이 자신이 집을 떠나올 때 오빠에게 들었던 축복과 똑같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아마도 이것은 리브가에게 자신이 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도 이와 비슷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회자가 될 것을 요구하셨을 때, 그것을 확인하게 해 준 것은 그 어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확신이 있다는 것과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길을 가게 될 때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리브가가 거의 아브라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이삭이 네게브 지역 브엘라헤로이 지역에 거주하다가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아마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죽고 난 후, 그 마음이 허전했고 또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을 데리러 갔다고 하니 마음이 싱숭생숭 했던 것 같습니다. 들판으로 나온 이삭은 이러 저리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 멀리서 낙타 떼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리브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부터 지켜보았던 리브가는 종에게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종은 “저의 주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드디어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자신의 배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종은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이삭에게 말합니다. 이삭 또한 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낙타에 타고 온 처자,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베일로 얼굴을 가렸던 그 여인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고 또 만나게 해 주신 자신의 배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가 사용했던 장막으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집안의 빈 자리, 자기 마음 속의 빈 자리를 채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리브가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리브가가 어머니 사라가 떠나고 생겨난 이삭의 마음 속의 텅 빈 공간을 채워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필요 뿐만이 아니라 이삭의 정서적인 필요까지도 헤아리시고 그 필요를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순적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이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 속에 주어지는 복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순적함일 것입니다. 비록 다소의 굴곡이 있을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참 순적하게 이끌어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복받은 인생입니까? 우리 모두의 앞으로의 삶이 이 사건이 이루어진 과정처럼 순적하게 인도되어지고 또 흘러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기나긴 이삭이 아내를 맞이하는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아주 순적하게 시작되었고 또 아주 순적하게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서 또 다른 한 가지 일이 순적하게 끝나고 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아브라함의 역할을 이삭이 물려받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자신의 종을 이삭의 아내감을 구해오라고 할 때는 아브라함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르면 종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을 향해서 주인이라고 부르며,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리브가를 새로 만든 장막이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가 있었던 그 장막으로 맞아 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은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흘러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순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의 세대교체가 이렇게 부드럽고 물 흐르듯이 움직여 가는 것을 보면서 제 머리 속에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가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세대를 교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입장과 탐욕,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관계들과 정치적인 고려들… 이런 것들 때문에 교회들마다 몸살을 앓고 커다란 상처를 입으며 또 하나님 앞에서의 스스로의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삭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이 이야기는 그 일을 순적하고 행복하게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해 줍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그 안에서 이 일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아브라함도 그랬고, 아브라함의 종도 그랬습니다. 리브가도 정해진 길을 주저없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이삭도 종의 이야기를 듣고는 인간적인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순적한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도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확신하고 순종하기 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길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험 같아 보여도 그것보다 더 확실하고 순적한 길을 없습니다. 두번째로 그 이야기 전체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분별력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도 그런 일들의 의미를 헤아리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그 과정에서 정직하고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악한 것들이 그 일에 끼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순적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이든 교회가 움직여 가는 것이든 말입니다. 믿음, 분별력, 정직함과 신실함 속에서의 최선 여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더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순적함을 얻고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일도 그렇게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이 세 가지를 잘 붙드셔서 순적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