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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29. 새벽예배 -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창세기 91)



창2527to34 -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라2(창9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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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5장 27-34절



제가 목회자가 되면서 제가 하게 된 가장 큰 고민은 제가 열정이 참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길고 가늘게 가는 것은 하라면 하겠는데 한꺼번에 쏟아붓는 것은 저에게는 항상 너무 힘든 일어었습니다. 이것이 제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겠지요. 기도해도 잘 안 되고 힘을 써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내 은사구나.’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사역을 했고, 뭐 그래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말 그대로 저는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생긴대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는 우리 교회의 목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열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단순히 스타일이 그렇다고 변명할 수 없는 일이고 또 내가 이 교회의 목회자로 섬기는 한 그대로 놓아두어서도 안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정말 이 문제를 놓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정말 절실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예전처럼 기도하다가 절망도 찾아왔습니다. 금새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제가 불쌍해 보이셨는지 제 마음에 우리 성도들의 영혼에 대한 열정과 교회의 영적인 부흥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와 함께 제가 교회와 여러분을 섬기는 사역의 온도도 점점 더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저의 사역이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없는 열정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마음이 뜨거우니 그 뜨거움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움직이니 마음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뜨거워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불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계속 기도하면서 은혜를 구하려고 합니다. 계속 더 뜨거워져서 불을 붙이는 불이 되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불이 될 때, 그 불은 분명히 우리 성도들에게도 옮겨 붙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소망하면서 기도하고 또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과정에서 얻기 시작하고 또 지금도 누리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유였습니다. 이전에는 뜨거운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성향 탓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죠. 그것 때문에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 자유롭습니다. 그런 자책감도 많이 없어졌고 더 이상 스타일 핑계를 댈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저 여전히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 하나님께 아뢰면서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계속해서 제 스타일만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저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냉냉한 가슴을 가지고 영적인 부흥을 일구어 내려고 끙끙거려야 하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끙끙대고 있는 저에게 “너 그래서는 안된다. 그냥 그대로는 안된다. 네가 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고 저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했지만 그 순종의 열매는 자유였습니다. 저는 이 순종이 저 개인의 평안함과 자유라는 열매로만 맺혀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제 마음의 뜨거움을 회복시켜주시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제가 느끼기에는 우리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같습니다. 주일예배 분위기도 달라지고, 금요기도회에 나오시는 분들의 기도소리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사역이 억지부리는 것이 되지 않기 시작하니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도 더 편해지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훨씬 편안해 보이구요. 


성도 여러분, 아마 여러분에게도 “이게 나야!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기질과 성향이 있을 줄로 압니다. 아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기질이고 또 성향이겠지요. 그러나, 계속 그것만 고집하고 거기 머물러 계시면 그게 여러분의 틀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이 거기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도 그만큼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귀찮게 여겨지더라도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를 고집하면 안됩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도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전혀 어쩔 수 없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는 충분히 그것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지 않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통해서 훨씬 더 능력있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오늘은 본문과 더불어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 그러니까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는 구절에 들어있을 것입니다. 에서는 배가 고픈 나머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 짧은 말 속에는 한 가지는 터무니 없이 과장되어 있고 또 한 가지는 굉장히 낮게 값이 매겨 있는데 실은 이것이 에서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에서에게 있어서 너무 크게 과장되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배고픔입니다. 에서가 배가 고프기는 많이 고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죽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심각하게 배가 고팠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너무 낮게 값이 매겨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장자의 권리입니다.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의 권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픔 때문이라면 언제든지 내 던질 수 있는 그저 이름뿐인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그럴까요? 정말 팥죽 한 그릇으로 배를 불리는 일보다도 가치가 없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장자의 권리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받아 온 세상을 복되게 할 그런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의 가치는 정반대로 값이 매겨져 있었습니다. 


배고픔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사탄이 예수님도 붙들고 시험을 하려고 들었을 정도로 가장 절실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이 배고픔의 문제를 조금 넓게 생각해 보면 이 배고픔에는 인간의 모든 현실적인 필요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권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영적인 신분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실패란 넓게 본다면 자신의 현실적인 필요는 너무 크고 중요하게 평가하였지만 반대로 정말 중요한 자신의 영적인 신분과 소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난 실패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가치평가는 항상 반비례 합니다. 물론 현실이 중요합니다만, 우리가 현실에 너무 큰 가치를 두고 항상 그것 중심으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영적인 것들은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 소명, 하늘의 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등. 진짜로 가치있는 것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덜 중요한 것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고, 전혀 가치없는 것을 붙들기 위해서 진짜로 가치있고 영원히 가치있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자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현실적으로는 조금 더 넉넉하고 편안할지 몰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인 복들은 모두 놓치고 맙니다.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것이 오늘을 사는 에서들이 항상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현실적으로 무슨 유익이 있고 소용이 있겠는가?”하고 말입니다. 영적인 복들은 분명히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팥죽 한 그릇보다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복들은 우리 영혼을 만족하게 하고 배부르게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살아갈 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복들은 무한한 가치가 있고 영원히 유익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결코 줄 수 없는 유익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현실 때문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 보이는 영원한 삶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과도하게 크게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영원한 것들을 위해서 투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신분과 특권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하며, 항상 거기에 무게중심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서 에서의 실패가 반복되게 하지 않을 수 있고, 진짜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인생을 투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에서의 질문이 고개를 들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유익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현실의 유혹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항상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그래서 자녀답게 사는 삶이 가장 귀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장자의 명분’임을 잊지 마시고 잘 지켜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