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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1.24. 금요기도회 - 사울아 사울아(사도행전 47)


행0901to09 - 사울아 사울아(사도행전47).pdf


20140124 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9장 01-09절



유명한 007 시리즈 중에 ‘살인면허’라는 조금은 섬뜩한 제목의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영국의 정보원인 제임스 본드가 극악한 마약범인 산체스를 처리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일한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 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정말 어떤 나라는 자국의 첩보원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그 영화가 전혀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며, 현실 속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정하고서 만들어진 영화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에 걸맞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럴 수 있는 권한만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일을 실행에 옮기기도 합니다. 스데반은 공회에서 복음을 전한 일 때문에 돌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으니 그렇게 죽어도 마땅하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스데반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 그러니까 사울이 그 일의 증인으로 스데반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바라보는 사울…. 아무리 그것이 율법이 명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한 사람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또 그 죽는 모습을 태연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인 것에 틀림 없습니다. 


이런 유대인들과 사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이 사람들을 닮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타당한 이유만 있으면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아무런 감정없이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마음인 것 같지만,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중에는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도 없고 또 절대적으로 불의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와 불의는 실은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차이가 굉장히 클 수 있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사회와 공동체,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행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인간의 당연한 권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일들을 자기의 권리라고 여길 때, 인간은 인간 본연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고, 잔인하고 교만한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스데반이 죽고 나서 사울은 아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나섭니다. 당시에도 이미 신세대 랍비로 유대 지도층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사울은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의 가정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오히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갔고, 그렇게 흩어져 가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만 핍박하는 일로 예수믿는 일을 막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각 도시에 있는 회당으로 보내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체포하라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사람을 자처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망쳐 놓고 있으니 그 일을 바로 잡는 일이야 말로 그 어떤 일보다도 정당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다메섹이었으니 다른 곳보다 먼저 그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울을 향해 내리 꽂혔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땅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사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정말 이상한 것은 사울은 그 빛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 앞에 꿇어 엎드린 사울은 그런 질문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잡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심각하게 망가뜨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먼 곳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서 24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생각되는 음성이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시 되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참 이상한 질문입니다. 이미 주님,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나서 다시 누구냐고 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사울은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늘에서 들려온 대답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그 빛이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일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은 분명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밝힙니다. 그렇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이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예수 때문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일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루살렘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그 동안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했던 모든 일들이 실은 그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북받쳐 오르는 열정으로 한 일이 알고보니 그 열정의 온도 만큼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망치는 일이었으며, 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 사울의 정신적인 충격은 아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눈을 떴지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로 그냥 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줄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 그리고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일은 그야 말로 인류의 역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꾼 그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심 이야기를 함께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큰 틀에서 배울 수 있는 진리는 역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지키시며,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져서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절망과 낙심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우리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며, 또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최대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결국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못하실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은 다 하나님의 속깊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이야기는 이렇게 현실을 바라보는 안경의 역할을 해 주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촛점을 맞춰 제대로 보게 해 주는 안경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해 놓고서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라고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이런 사람이니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이 말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또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책 제목처럼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바로잡지 못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다른 사람이든 혹은 나 자신이든 포기하거나 채념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바꾸시고 새롭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할 때는 그래도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을 그만두고 고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믿는 것, 틀리지 않다고 믿는 것은 정말 고쳐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울이 저지르고 있었던 잘못은 고쳐지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바른 일이었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그런 잘못도 바로 잡으셨습니다. 단 몇 초간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그 이전과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정반대의 마음과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가장 극렬한 박해자가 가장 헌신적인 전도자가 되게 하셨고, 눈 앞에서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도 눈도 깜빡하지 않았던 냉혈한을 성도들을 위해서 우는 아비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어 가셨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사울의 변화 이야기를 여기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사울이 이렇게 변했다면 사울의 변화에 못 미치는 변화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그 누구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믿게 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가 ‘이 인간은 안돼!’라고 저쪽으로 치워놓은 사람은 혹시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 무관심해 졌을만큼 그 사람의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이웃 중에, 가족 중에, 혹은 남편이나 자식 중에 그렇게 괄호 밖에 내놓은 사람은 없습니까? 혹시 그 대상이 나 자신은 아닙니까? 여전히 변화되어지고 새로워져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으면서도, 변화와 새로워짐에 대한 소망을 버린 채 그냥 이대로 살아가겠다고 고집하거나 체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체념과 포기 속에, 그리고 무관심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개는 그래서 그 쪽을 택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는 성도라면 우리는 그 누구도, 그게 나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 하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바로 잡아가며 변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다른 이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그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괄호 밖에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거든 그 사람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도 변화시키실 것을 믿는다고, 그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저도 다시 한 번 그래야 할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일 것입니다. 포기하고 체념했던 나의 어두운 곳, 부끄러운 곳, 자꾸 걸림돌이 되어 나를 넘어지게 하는 그런 곳,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그런 곳이 변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보면 사울처럼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할 구석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열쇠를 사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변화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맞닥뜨렸을 때였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주님을 뵈었을 때입니다. 그는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을 통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조차 포기하고 살 정도로 잘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빛나는 광채에 눈 멀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자신만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좌절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상처를 잘 받고 의지도 약하고, 자기 마음 하나 전혀 다스리지 못하고 또 예수를 믿으면서도 방향 없이 살고 있었고, 왜 나같은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바꿔놓은 것은 제가 하늘의 영광을 맛보아 알았을 때 부터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맛보고 그 영광을 보는 눈이 뜨여지자 그것을 보는 눈은 점점 더 밝아져 갔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해서는 오히려 눈이 어두워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좋은 것이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저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또 그 찬란한 하늘 영광이 하늘나라에서 내가 누릴 영광이라고 생각하니 그것을 더 크고 풍성하게 얻는 일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저 자신을 굉장히 세밀한 부분에서까지 변화되게 했습니다. 하늘영광을 아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생기게 되어서, 거기 어울리는 성품과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 땅에서 사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은 그가 땅에 묶여 있고 또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그렇게 땅에 묶여 있고 자신에게 묶여 있는 이유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을 맛본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고,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을 가장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삶고 생각도 성품이나 심지어는 감정까지도 거기에 맞춰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진지하게 도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면서 여러분의 영혼 속을 적셔 들어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빛난 광채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광채로 인해 세상이 빛을 잃고 나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꼭 그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난 영광을 맞닥뜨리고 하늘 영광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그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경험을 하는 것을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로 여기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항상 생각하고 또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하고 황홀한 경험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고 또 내 삶을 변화시킬만큼 능력있는 변화이기도 하며,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는 영광스러운 변화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바꾸시고 바로 잡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구차한 삶을 떠나 하나님의 빛난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이 빛나는 영광의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변화의 소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무슨 이유로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 찬란한 빛 가운데서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그치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은 바꾸실 것입니다. 나를 바꾸고 또 내가 포기했던 그 사람도 새롭게 하시고 바꾸실 것입니다. 


이제 찬송 한 곡을 함께 부르고 주신 말씀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찬송가 288장 인데요. 정말 이 찬송의 은혜와 경험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한 소원을 담아서 고백하면서 부르겠습니다. 


1.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후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 하리로다


2.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후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 하리로다


3.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후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 하리로다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을 맛본 자들의 능력과 행복입니다. 이제 이 은혜를 달라고 이 은혜 가운데, 내가 먼저 변하고 새로워지게 해 달라고, 특히 여러분 자신의 부족한 부분, 여러분을 실망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는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이 부분이 변화되게 해 달라고. 하늘영광에 걸맞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정말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