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2.14. 금요기도회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사도행전 49)



행0919bto31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사도행전49).pdf


20140214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9장 19b-31절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요 목회자요 또한 신학자였던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폄하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제외하면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신약성경의 절반이 그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게 사용하셨다는 명확한 증거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위인들을 생각할 때도 그렇지만 우리가 사도 바울을 생각할 때 자주 바울 개인의 탁월함과 특별함에만 집중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바울 또한 혼자서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 말이 모든 위대한 인물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무인도에 혼자 던져 놓았더니 저절로 위인이 되어 나타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울을 사도 바울이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저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이 홀로 사울을 사도 바울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우리가 아는 그 사도 바울로 만드시기 위해서 꼭 필요한 도구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도구들은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맞닥뜨린 사울은 눈이 멀었지만 그는 눈을 떴고 기력도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낸 후에 그는 갑자기 다메섹의 회당이란 회당은 다 돌아다니면서 아주 충격적인 행동을 합니다. 공문을 내보이는 대신에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 클래스가 다르다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정말 사울은 처음부터 클래스가 다릅니다. 아얘 유대교의 본거지로 뚫고 들어가서 거기에 복음의 폭탄을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전에 성도들을 핍박할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피해가지 않고 정공법을 펼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바울을 보고 말 그대로 경악했습니다. 물론 이 놀람은 대개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런 반응에 오히려 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반응은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만큼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확신하게 해 주는 증거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명해 보였고 이 일은 이제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휘저어서 당혹스럽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색출해 내야 할 사람이 회당마다 다니면서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야라고 증명해 보이고 있으니 그들은 그렇게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으려고 합니다. 단순히 고상하게 예수 믿고 싶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고 심사숙고 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적당히 믿으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변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변하면 편안한 삶을 내려 놓아야 할 것 같고, 또 자기가 변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변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이후의 최고의 선교사라고 불리는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한 때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에 “너는 성령충만을 위해서 너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나의 전부를 다 내놓고서라도 성령충만을 원한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90살이 넘을 때까지 그에게 충만하게 임재해 계셨던 성령님이 그를 다스리기 시작했던 위대한 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되지 못한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된 후의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진짜 모습, 우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변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속상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할 정도로 그만큼 변화되는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단해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본문에서는 그저 여러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가 갈라디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무려 3년 동안이나 되는 긴 기간이었습니다. 이 3년동안 사울은 다메섹에 인접해 있는 아라비아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아라비아에서 더욱 더 단단히 복음으로 무장한 사울은 또 다시 다메섹에서 더 위력적인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해서 성문에 상주하면서  사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이 사울에게까지 알려졌고 그래서 사울은 몰래 다메섹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사울이 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울은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하면서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 바나바의 등장으로 바울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 또한 엄청난 일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의 증인이 되었던 곳이고, 바로 거기서 대제사장에게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 허가증을 받아냈으니까요. 그런데 사울이 이제 이런 예루살렘에 나타나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하면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논쟁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반응이 좋았을 리가 없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역시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형제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 일을 알고 사울을 가아사랴로 데리고 나와서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회심을 한 이후에 고향인 다소로 가기까지 그 중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인데요. 제가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사울 중심으로 들려드렸지만 사실 이러한 사울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는 사울만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사울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맞닥뜨린 순간부터 그랬습니다. 그는 혼자 다메섹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함께 가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들어가서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을 찾아갔고 사울에게 안수하여 그를 다시 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머물렀는데, 아마도 이 일을 주선한 것이 아나니아였을 것이고, 그래서 또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사울을 받아들여 주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며칠 간이 사울에게 아주 중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며칠간 사울은 그들로부터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더 분명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며칠이 지난 후 즉시 다메섹의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고 증명했던 일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위험해진 사울을 위험에서 건져 준 사람들은 그 동안 사울의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믿게 된 사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위험해 질 것을 무릅쓰고 커다란 광주리에 사울을 달아내려 다메섹에서 살아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려고 했지만 그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하기만 할 뿐 전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 나선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나서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그 동안 사울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사울은 제자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당당하게 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위험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 위험을 간파한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사울을 몰래 가이사랴로 안내하고 거기서 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주었습니다. 


물론 사울이 변화된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를 그렇게 바꾸신 것이죠. 그러나, 만약 그가 그의 변화의 과정 속에서 만난 위와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는 중간에 좌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위험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역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한 사람은 사울을 위해서 거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구요. 다메섹의 제자들은 사울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단기 양육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또 그의 제자들은 구원자와 보호자가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평판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울의 변호인과 후견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그를 믿고 용납해 주었습니다. 자신들을 쥐잡듯이 잡으려고 했던 당사자를 말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마지막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도 형제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쉬운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입장이나 자기 이익, 그리고 자기의 안전만을 생각했다면 그 누구도 사울을 위해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어느 부분에서인가는 자신을 내려놓고 사울을 위한 존재가 되었을 때, 사울이 위대한 전도자로 세워져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다 누구입니까? 사울을 이렇게 세워준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람들이죠? 그렇습니다. 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입니다. 각각의 위치나 처지는 달랐어도 이들은 모두 몸된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사울에게 해 주었던 역할은 교회가,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다른 성도들을 향해서 해 주어야 할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는 미국의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참 은혜롭고 좋은 책이지만 자신을 많이 되돌아 보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 자신도 이 책을 통해 작은 회심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성도가 윤락가의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여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는 것을 보고서 교회에 가면 치유가 되겠다 싶어서 왜 교회에 가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가라구요? 저는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요?”라고 말입니다. 이야기인 즉, 교회에 가면 상처만 더 받을텐데 왜 교회에 가야 하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아마 그 여인은 이전에도 그런 이유로 교회에 갔다가 더 큰 상처만 입은 경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00퍼센트 수긍하기는 힘들어도 그렇다고 완전히 부인하기도 힘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다 거룩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틀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틀에서 많이 벗어나는 사람을 용납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그렇지만 실은 우리들 자신도 그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또 우리가 거룩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은혜 덕분에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 입니다. 다 예수님 덕분에 살아나고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 나누고 견제하고 또 배제하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역할, 그리고 성도의 역할은 서로가 서로를 위한 거처가 되어 주고 양육자가 되어주고 보호자가 되어 주며, 후견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해도 믿어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왜 교회에 와도 그다지 기쁘지 않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그런 곳이 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그리고 그 교회를 이룬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사람들이 되어주기 위해서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교회에 그렇게 받아 들여지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0절을 보면 ‘형제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자들, 제자들 하다가 갑자기 형제들로 호칭이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관계의 변화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가 되어 주어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여 주어야 합니다. 형제가 어디 다 맘에 들어서 함께 사나요? 모두 다 이뻐서 형제를 사랑하나요? 맘에 들지 않아도 모자란 구석이 있어도 그저 형제이기 때문에 함께 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욕을 하면서도 가슴 아파하며 함께 살며 그래도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형제입니다. 


9장의 마지막 절인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왜 초대교회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며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령의 위로 속에서 숫적인 성장까지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그리하여’라는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교회가, 그리고 그 당시의 성도들이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로에게 거처가 되어주고, 양육자가 되어주고, 보호자와 후견인이 되어 주었으며 또 부족한 점이 있어도 믿어주고 용납해 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는 31절과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초대교회 성도들이 지녔던 아름다운 마음을 회복하고 서로를 사랑하기 위하여 헌신한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똑같은 열매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이 더해지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우리들입니다. 은혜 덕분에 사는 우리들입니다. 더욱 더 은혜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시며 서로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세워주기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나도 그 안에서 행복하며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갈 것이고, 우리 광현교회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가며 성장해 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이시듯이 사람들 또한 은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바울을 바울 되게 했던 그 누군가의 역할을 감당해 줌으로써 가장 행복한 교회의 가장 행복한 지체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