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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2.21. 금요기도회 -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사도행전 50)


행0932to43 -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사도행전50).pdf


20140221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9장 32-43절



회심한 사울의 복음전도는 거침이 없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정말 여기 저기 유대교의 본거지들을 벌집 쑤시듯이 쑤시고 돌아다녔습니다. 그 결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사울을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를 가이사랴로 빼내어서 거기서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습니다. 아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손길이 못 미치고 로마의 시민인 사울이 충분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기 고향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렇게 갑작스런 등장 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일단 성경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 때 다시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 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언제입니까? 사울이 정말 엄청나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 때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때 복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렇습니다. 누군가가 빠져 버리면 큰 일 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사용하시는 종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볼 때, 그래서 너무 사람중심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 사람의 수고와 섬김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그 사람이 없으면 교회가 문 닫을 것처럼, 하나님의 일이 금새 파탄 날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보조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사람중심으로 생각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이는 교회, 사람에게 휘둘리는 교회가 되며, 또 언젠가는 하나님 생각 안하고 내 맘대로 하려고 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교회를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교회 안에서의 사람의 역할을 상대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에 놓아둘 때, 교회는 비로소 사람이 흔들 수 없는 하나님의 든든한 교회가 됩니다.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로 갔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는 목적지도 없고 정해진 코스도 없이 그저 여기 저기 돌아다닌 듯이 보입니다. 어쩌면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겼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였고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고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목표나 목적지가 없어도, 또 방향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방향 없이 헤메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있고 내가 그 인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확신이 있는데 그것보다 더 확실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리 가라 하시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시면 저리 가고… 그렇게 하다가 룻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애니아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8년 동안이나 전신 무기력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난 베드로는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룻다와 그 옆의 사론이라는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이 소식이 좌악 퍼졌습니다. 가까운 곳이니 사람들이 와서 애니아를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소식은 가까운 마을들로도 퍼져 갔고, 그 마을들 중에는 욥바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 때 욥바의 교회는 아주 슬픈 일 중에 있었습니다.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병에 걸렸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다비다의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안타깝고 슬픈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가 선을 행하고 남을 돕는 일을 아주 많이 하면서 아주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욥바의 성도들에게도 그랬겠지만 우리들에게도 조금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닙니까? 정말 예수를 잘 믿고 힘껏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섬겼던 그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이렇게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다니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건강하기만 한데 말이죠. 우리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생과 사, 그리고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움직여 가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 속에는 사필귀정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어서 선하고 좋은 사람은 오래 오래 복 받으면서 살아야 하고 그 반대인 사람은 또 그 반대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나쁜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내가 보는 눈 앞에서 당장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불공평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생각이나 기대대로 그렇게 움직이실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만 생각해 보아도 왜 그런지가 분명해 집니다.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만 하나님은 전체 역사와 그 속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전부 다 보시며 그 모든 것들을 모두 연관지어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결국에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최고의 선을 위한 재료가 되게 하시는 방식으로 움직여 가십니다. 그러니 그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은 커녕 우리 자신의 삶 전체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알래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심지어는 사탄이 망가뜨려 놓고 사람이 망쳐 놓은 일들까지도 사용하셔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실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영국의 어떤 크리스챤 판사는 자신이 항상 불완전한 재판을 할 수 있고 또 때로는 오판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좌절하지 않고서 판사로 일하는 이유에 대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가 되면 분명히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하고 정의롭게 다시 바로 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믿음과 소망입니다. 


우리는 욥바의 성도들에게서 절망스럽게 힘든 일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죽었으니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곡을 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빨리 베드로를 데리러 룻다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강청해서 욥바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죽어서 주검이 되어 있는 다비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이 베드로가 이 여인을 꼭 살려줄 것이라고 믿고서 베드로를 데리고 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다비다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리시고 살리시지 않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는 것 또한 믿고 있었습니다. 이 두 믿음으로 그들은 급히 사람들을 룻다로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기도와 관련하여 믿음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바라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그것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는 하나님의 뜻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정말 좋은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신뢰가 되니까요. 욥바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다비다의 시신이 누워있는 다락방에 도착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살려달라고도 기도했겠지만 또한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을 구했을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도를 다비다를 살리는 쪽으로 들어 응답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비다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그랬더니 다비다가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앉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과 다비다의 사랑의 섬김을 받았던 미망들을 다시 다락방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시 돌아온 다비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욥바에 널리 알려졌고 그 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두 도시에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곤경에 처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신 무기력증에 빠져 8년 동안 자리에만 누워있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을 병에 걸려 결국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리 저리 두루 돌아다니던 베드로가 첫번째 도시에 그 도시에 사는 성도들을 보려고 들릅니다. 그리고는 그 도시에 있었던 첫번째 사람을 고쳐 줍니다. 베드로가 그 도시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두번째 도시 사람들은 그렇게 이미 고인이 된 사랑하는 성도가 베드로를 통해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서 베드로를 데리고 갑니다. 두번째 도시에 도착한 베드로는 거기서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합니다. 베드로의 순종을 통해 전혀 해결할 길 없는 곤경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두 사건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방문이 결국 두 도시의 구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베드로가 첫번째 도시인 룻다에 들어갈 때, 그가 그 이후에 이런 일들을 하게 될 줄 알았을까요? 그렇지 않죠. 그는 그저 인도하시는 대로 룻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두 사람을 만났고 그 일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인도해 주시는 것과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누구를 만나거나 혹은 어디를 가거나 혹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모든 일들의 이유와 목적을 미리 알고서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시거나 요구하시는 것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나면 “아! 이래서 하나님께서 그 때 그 일을 시키셨구나.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게 하셨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재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이후부터 자기가 자기 삶을 계획하고 또 이끌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발 한 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런 삶이 불안할까요? 목적이 없는 정처 없는 삶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넘치는지 모릅니다. 또 그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일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그 계획을 이루려고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 불안하고 정처 없는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일단 그 계획은 이 작은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계획 자체가 완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될거다.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애써 그런 불안함을 달랠 뿐이죠. 사실 그것이 사람들이 거창하게 비젼이다, 혹은 마스터 플랜이다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나를 안심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거창한 비전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빡빡하게 짜여진 시간표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기에 그 분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최선의 삶으로 만들어 가는 방법입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획은 언제 이루어질까요?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우리가 밀고 나갈 때 이루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때 그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집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갔고, 그렇게 옮겨간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일을 통해서 저절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얼마나 재미있고 흥분되었을까요? 이런 재미와 흥분 속에서 살아가는 베드로는 아마 그 다음 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실 일에 대한 기대로 밤잠을 설쳤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다릅니다. 그 계획이 다른 만큼이나 우리의 삶의 모습도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도 모두 다 다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가는 것. 이것이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또 사람들이 아무리 다양해져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만나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크든 작든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의 삶이 활기차고 생생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면 됩니다. 항상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신나는 삶을 사시고 또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면서 살아있고 확신있는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