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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3.07. 금요기도회 -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사도행전 52)


행0936to43 -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사도행전5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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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9장 36-43절


요즘 우리는 연일 들려오는 기독교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들 때문에 이제는 걱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소식들이 그저 소문이거나 낭설일 때가 많았는데, 요즘 들려오는 소식들은 결국에는 소문보다 더 커다란 사실들로 밝혀지고 있고, 또 그런 일들에 대한 기억과 부끄러움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또다시 언론을 통해서 들려오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떨구어진 우리의 고개를 더더욱 무거워 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명한 젊은 목회자의 성범죄, 대형교회의 건축을 둘러싼 사회적인 물의와 그 가운데 저질러진 비리들, 그리고 그것을 가리려는 또다른 거짓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목회자와 관련된 재정적인 비리들과 그 모든 죄악들에 대한 전혀 회개할 줄 모르는 그 뻔뻔함… 누군가가 이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너희들의 모습이냐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비록 선하고 아름답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믿는 신앙이 옳은 신앙이라고 주장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에는 한국교회 내부적으로도 한국교회의 위기라는 말이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흘러나오고 있지만 이제는 그 누구하나 예전처럼 아니다, 어두운 면만 보지 마라, 아직은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은 비단 성직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 전체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저는 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이렇게 부끄럽고 절망스러운 모습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그 가장 큰 이유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내면화 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자기 속사람을 새롭게 만들어 일로 연결시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책임인데요. 목회자들이 목회를 활동으로 바꾸어 버렸고, 그 과정에서 신앙은 활동이 되고 훈련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무언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또 타이틀이 분명한 제자훈련을 행하지 않으면 성도든, 목회자든 불안해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목회자도 성도들도 명분이 그럴 듯한 사업을 하지 않고 또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비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이 어떤 프로그램이든 아니면 사업이든 아니면 비젼이든 그것 자체가 신앙을 참된 신앙이 되게 하고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책임져 주지는 않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속 사람이 변하지 않고, 또 사업이나 활동이 그러한 변화의 증거가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불안함을 달래는 일시적인 위안거리만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는 더더욱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현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한국교회는 수많은 활동들을 해 왔고, 또 수많은 훈련을 수 십년 동안 해 왔고, 그것들이 무언가 커다란 열매를 맺는 것 같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들 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신앙의 천박한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정말 앞으로 언젠가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는 정말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히브리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아서 다비다는 유대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그도 유대교에 속해 있을 때에는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일이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피상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그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비다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이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아니면 그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그건 그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을 따르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을 일컬어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르니까요. 특별한 제자들은 사도들이라고 부릅니다. 나머지는 그냥 제자들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모든 예수 믿는 성도들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제자입니까 아니면 그저 신자입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습죠? 신자면 다 제자인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들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자 외에는 다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는 그저 마음으로만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누구의 뒤를 따라야 할까요? 우리의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모범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려고 애쓰는 모습만큼은 우리에게서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비다는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나 일곱 집사들처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거나 혹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향기 만큼은 그 어떤 사도와 집사들의 삶 보다도 더 향기로웠습니다. 성경은 우선 그에 대해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말합니다. 적당히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남들에게 베푸는 일을 심히 많이 했습니다. 그의 삶은 그렇게 선한 일을 하고 베푸는 일로 가득 찬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 자체가 선을 추구하며 남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악을 생각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 악한 것들을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한 것만 생각했고 선한 일을 추구했으며 그래서 선한 일로 자신의 삶을 채웠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을 주고 나누는 일로 채워갔습니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선한 일을 추구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눠 줌으로써 다른 이들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자였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어서 장례식을 많이 집례하다 보니 저절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장례식처럼 정직하게 그 사람의 삶을 말해 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갔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힘과 재력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제서야 그 사람의 인생은 제대로 평가되기 시작합니다. 살아있을 때 아름답게 살았던 사람들의 장례식에는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장례식이 외롭고 썰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문객의 숫자는 자녀들의 영향력하고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고인이 떠난 것을 정말로 애석해 하고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장례식장에 가 보면 심지어는 식구들까지도 그렇게 슬퍼하지를 않습니다. 고인이 간 것을 별로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비다의 죽음은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다비다가 이미 죽었는데 사람들은 베드로를 부르러 보냈고 베드로는 그들의 강청을 이기지 못하고 룻다에서 욥바까지 끌려 왔습니다. 베드로는 도대체 누가 죽었길래 이렇게 난리인가 했겠지만 다비다의 시신이 누워있는 다락방에 올라가 보고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욥바의 교회에 속한 ‘모든 과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욥바 교회 성도들은 모두들 다비다의 죽음을 아까워 하며 또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망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손에 속 옷과 겉옷을 쥐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속옷은 오늘날의 속옷과는 조금 개념이 달랐지만, 여인이 그것도 그 옛날의 기준으로 자신의 속옷을 처음보는 남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겉옷 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그 겉옷과 속옷이 지금은 주검이 되어 누워있는 다비다가 그들을 위해서 만들어 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옷이 그렇게 귀하지 않습니다만, 우리나라도 한 30년 전만 하더라도 옷이 굉장히 귀했습니다. 옷은 그저 명절이나 되어야 새 것 하나 얻어입을까 말까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전의 사정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남성의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성인이 될 때, 새 옷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당시 옷이 얼마나 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시 최고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미망인들이 자기 옷을 사거나 혹은 만들어 입는다는 것은 정말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겉옷이 아니라 속옷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은 더더욱 그랬겠죠. 그런데, 다비다는 그런 미망인들에게 겉옷 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도 지어 주었습니다. 한 번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그 필요를 헤아려서 때마다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미망들의 옷을,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겉옷 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신경 써 주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신경쓴다고 한 들 누가 그것을 손수 지어서 그들에게 가져다 주겠습니까? 그런데 다비다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그 옷은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숨겨진 필요까지 헤아려서 그것까지 채워준 다비다의 속깊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옷을 그렇게 손에 들고서 베드로에게 보여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비다가 그들의 겉옷과 속옷까지 손수 지어서 입혀주었다면 그가 그 미망인들의 다른 필요를 채워주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선행과 물질을 나누는 일로 자신의 삶을 채웠던 다비다는 분명히 그 누구보다도 그들의 필요를 챙겨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제자의 마음을 가지고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자기 속사람을 바꾸고 또 삶을 바꾸는데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질 수 밖에 없었던 사건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비다는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다비다는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흉내내며 산 예수님의 참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참 제자의 삶은 자신의 믿음, 자기가 믿는 내용을 속 사람의 일로 만드는 삶을 말합니다. 받은 은혜와 들은 진리의 말씀을 영혼 가장 깊은 곳으로 받아들여서 그 은혜와 진리가 자기 속 사람을 변화시키도록 순종는 삶,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워진 속 사람에서 흘러나오는 삶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비다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정말 나는 선한 일만을 생각하려고 애쓰며, 또 선한 일만을 추구하며 다른 이들의 내밀한 필요를 헤아려 그것까지 채워주려고 애쓰고 있는지, 내 속 사람은 과연 예수를 믿으면서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산양 중에 가젤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양이 있습니다. 이 가젤은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양인데요. 다비다라는 이름은 암컷 가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어미 가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비다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가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눈이 아름다워서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국 예수 안에서 진짜 다비다가 되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랑 가득한 어미 양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아름다운 마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과 사람들을 위한 어미 양이 되어서 그 선한 눈으로 위로하며 자기 가슴에서 나는 사랑의 젖으로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며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원하는 것은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사회를 위해서 엄청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세상은 결코 우리를 보고 감동하거나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삶의 한 자락이라도 주님을 닮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 분처럼 선한 것을 추구하며 또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희생하고 내놓는 그런 제자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크리스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름이라면 우리도 우리의 이름과 같아져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 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우리로 인해 마음이 움직일 것이며, 비로소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겉사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속 사람의 모습과 삶의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내면화 되어질 때, 우리도 예수 믿는 진짜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이 여러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도록 여러분을 내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져 가는 기쁨과 영광을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날을 사는 다비다를 닮은 눈과 가슴을 지닌 참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향기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며 이 세상과 이 땅의 교회 안에 가득한 욕망의 악취를 지우는 그리스도의 향기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