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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3.14. 금요기도회 -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사도행전 53)


행1001to08 -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사도행전5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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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9장 36-43절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또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저마다 모두 다릅니다. 의미가 다르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무게가 모두 다르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들을 다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생각하실 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의미,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바라보시고 또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의미의 무게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대하시는 태도 또한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차별은 아닙니다. 차별이란 겉으로 보이는 조건이나 편견 때문에 만들어 지는 것인데 반해서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 사람의 참 모습에 따라서 결정되는 참되고 편견없는 하나님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평가이며, 우리를 지으신 분의 평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치우치거나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제 계속되는 이야기의 무대는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옮겨 갑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의 총독 관저가 있었던 팔레스틴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도시에 살았던 한 사람에게 시각을 고정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 부대라는 식민지 주둔 군대의 고급장교였던 고넬료라는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정확하게 말하면 백부장, 그러니까 백명의 사병을 거느린 장교였는데, 부하 백명 있는 장교가 뭐가 고급장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일개 사병들까지 업무에 필요한 사람이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백 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백부장이 얼마나 대단한 부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고넬료의 지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이유는 성경이 그가 지닌 지위와 부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남이 가지지 못한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나 지식, 그리고 능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 때 그것 자체 때문에 사람 자체를 높이 우러러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때로 그것이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인내와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소개될 때도 있지만 그 때도 여전히 사람이 누리는 복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이야기 됩니다. 성경이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의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그것을 그 사람의 출발점으로 볼 때가 많습니다. 왕이니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써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께 커다란 복을 받아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가 그 복으로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 집중합니다.


오늘 고넬료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성경이 고넬료가 백부장이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그가 그런 명예와 부,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은 백부장인 고넬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이것이 성경이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가지고 있던 고넬료를 소개하는 첫마디입니다. 고넬료는 무엇보다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가지고 바른 삶을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고넬료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굉장한 장점이고 유익이 되지만 경건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 쉬운 것들입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자기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현실적으로 자기 자신만 의지해도 충분하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지니기가 그만큼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당시의 로마 사회가 우상을 숭배하고 또 로마황제를 숭배했던 사회였음을 감안해 볼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현실적인 댓가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적당하게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경건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훨씬 더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고 훨씬 더 잘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타협을 합리화 하지만 아마도 고넬료가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댓가는 지금 우리가 이 나라에서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댓가보다 훨씬 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고넬료의 경건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이어지는데, 첫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그의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집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집’이라는 말은 한 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종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결국 그의 직계가족들 뿐만 아니라 종들까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며, 고넬료는 비록 자신이 가장이요 주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들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의 경건이 거짓된 것이었거나, 그의 삶이 그의 경건을 전혀 뒷받침 해 주지 못했다면 아마 성경은 그가 종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종과 상전이라는 가장 비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도 경건의 본이 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기꺼이 그가 그의 온 집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고넬료는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는 식민지를 다스리는 군대의 장교였으면서도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을 실제적으로 돕는 일에 열심을 다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일본 장교가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의 구제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구제는 민족이나 처지를 초월하여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진실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제가 섬기던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주변의 소년소녀가장을 도우려고 하다가 굉장히 실망스럽고 마음 아픈 경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여전도회에서 자발적으로 주변의 소년 소녀 가장을 돕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저에게 부탁을 하시길래 동사무소에 알아 보았더니 도우려면 도울 수 있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 덧붙이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십대의 아이들은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그들은 직접 자기 집에 와서 일해 주고 도와주는 것을 굉장히 창피해 하고 힘들어 하니까 그저 뒤에서 도와주는 후원자가 되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와서 여전도회에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아할 것 같았던 여전도회에서 그러면 자기들은 그 일을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왜냐고 물어 보았더니 대답인 즉, 자기들은 직접 가서 밥도 해주고 반찬도 해 주고 그렇게 도와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고 하니 자기들은 그들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 우리가 돕고 싶은 방법으로, 우리가 돕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서 돕는 것이 과연 그들을 돕는 것일까? 진정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그저 그 사람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바로 그 도움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무언가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돕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의 구제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참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은 그에 대해서 그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해석하면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기도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버릇이 되면 얼마든지 형식적으로도 계속해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일 천 번제다 뭐다 해서 그저 습관으로도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고넬료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다면 성경이 고넬료가 계속해서 기도했다고 말할 리는 없습니다. 고넬료는 계속해서 그것도 진심으로 기도드렸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원래 내 연약함과 부족함의 고백이며,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의지와 신뢰의 고백입니다. 자신이 부족하며 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진정으로 계속해서 기도드렸다는 것은 고넬료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지위, 그의 권력, 그의 명예, 그의 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했으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입니다. 참 드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찾아갔던 날도 고넬료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그 시간을 구시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시각은 유대인들이 오후 기도를 드리는 오후 세시였습니다. 그고넬료를 만난 천사는 고넬료의 이름을 부른 후에 놀라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정말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고 또 행복할까요? 우리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천사는 하나님께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기억하고 기념할만한 것이 되었다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과 행위를 기념하신다니 정말 놀랄만한 일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이 주님을 진짜로 기뻐하시게 하면 그것을 기억하시고 기념할만한 보배로운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 대해서 기억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의 기도와 구제입니다. 기도만 기억하신 것도 아니고 구제만 기억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아주 특별하게 여기신 이유는 그의 삶과 신앙 속에는 기도도 있었고 또 구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겸손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사람들에게는 항상 진실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고넬료는 참된 경건을 지닌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를 특별하게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삶과 신앙을 기쁘게 받으셨고 그래서 기억하고 계신다고 말한 후에 “이제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고넬료가 복음을 듣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이 4절과 5절에 나오는데요.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특별한 연결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나서서 고넬료를 챙겨 주시고 나서서 복음을 듣게 해 주시는 이유가 그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에 복음이 빠져 있었으니 하나님께는 이것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셨고 그래서 직접 나서서 챙겨주셨던 것입니다. 대개는 스스로 복음을 듣고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고넬료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주셔서 복음을 듣게 해 주신 그런 특별한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모두를 똑같은 무게로 바라보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혜를 주시지도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하늘이 열리고 놀랍고 귀한 은혜가 쏟아부어지거나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생기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앙도 참된 것을 좋아하시고 우리의 삶도 참된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참된 것일 때, 우리를 특별하게 대해 주십니다. 거의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기억하시는 참된 경건은, 그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귀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둘을 아우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을 추구하고 또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기억하실만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둘 중의 하나를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하는 기도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변의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도와주는 그런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은혜 가운데 애쓴다면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인생을 기억해 주시고 그 분의 특별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경건을 추구함으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실만한 삶을 살아서 주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