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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3.20. 새벽예배 - 영생은 곧(사순절 3-4)



7. 요1701to03 - 영생은 곧.pdf


20140320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17장 01-03절




요한복음 17장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우리에게서 성취되어질 약속을 담고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 기도의 맨 앞 부분입니다. 맨 앞부분인만큼 이 기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이유와 목적을 다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 이유와 목적이 우리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오늘 이 기도를 묵상하는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드리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완전히 이루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뜻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때가 되었으니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 달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인데요. 이 부분은 얼핏 보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앞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짜 내용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때가 되었으니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과연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요구한 영광은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곳이었으며 또한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을 구속하신 왕이 되신 왕좌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십자가가 예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된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는 찬란히 빛나는 것도 아니었고, 달콤하고 낭만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가장 낮고 수치스러운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창조주이신 분이 벌거 벗겨져서 못 박혀 매달아 지셨으며,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까지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나중 영광은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지 그 십자가 자체가 고상하거나 아름다운, 자랑스러운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자신의 영광이라고 여기셨고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는 영광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빛나게 하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잘 되어야만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좋은 상황에서 영광과 칭찬을 받을 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은 비로소 가장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영광스러운 통로인데 그런 순종은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가장 빛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우선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이 곧 결국에는 나 자신과 온세상을 위해서도 가장 큰 유익과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통치하는 완전한 권세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빠짐 없이 구원하시고 또 영생을 주시는 일에 완전하게 성공하실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권세로는 불완전한 구원 밖에 이룰 수가 없으니까요. 물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맡기신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이유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만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를 온전히 예수님께 주실 정도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영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넘겨 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영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 두 분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안다는 말을 단순히 머리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할 때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의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경험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거하게 될 때, 그 관계의 엄청난 유익과 능력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와 우리가 친밀한 관계 안에 있을 때, 그것을 예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영생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렇게 온전하고 깊이 있게 알며 그러한 관계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끝나지 않는 육신의 생명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중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삶을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고 그 앎은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지금 여기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우리가 사순절을 통해서 회복해야 할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사는 은혜일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믿음 안에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며, 또한 그 힘으로 나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며, 그 영광을 위해서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순절 내내 새벽기도에 나오실 때마다, 그리고 예배로 모일 때마다 나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 또 회복시켜 달라고 잊지 마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충만하고 깊은 관계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꼭 기도하시면서 이 절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님께서 그렇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그 영생을 알고 또 누리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