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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3.28. 금요기도회 - 참으로 하나님은(사도행전 55)



행1023to35 - 참으로 하나님은(사도행전5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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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0장 23-35절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닌데, 어떤 경우에는 그 쉬운 만남이 너무 너무 어렵거나 혹은 불가능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와 네팔 처럼 사는 곳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만나기가 어렵거나 또 현대와 조선시대처럼 살아가는 시대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는 일이 굉장히 힘들거나 아얘 불가능해 지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곳도 비슷하고 사는 시대도 비슷한데 전혀 참된 만남과 교제가 불가능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간의 적대감이나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이 그런 만남과 관계를 가로 막는 장벽이 되는데, 이것은 때로 그 어떤 장애물 보다도 훨씬 더 넘기 어려운 벽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가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나쁜 편견들이 있었고 그 편견들이 바로 이들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 허물 수 없는 장벽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그것은 유대인의 사고방식 속에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의미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자신들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래서 특히 친교를 이유로는 함께 식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말고도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여자들에게 강제로 낙태를 시켜서 죽은 태아를 배수구에 버리거나 마루 밑에 묻어 두기 때문에 집이 부정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도 유대인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반감은 오히려 이유가 더 확실한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가장 싼 고기였던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죠. 또 매주 하루는 일을 쉬어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이것은 게으른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한 신전에서 열리는 파티나 신들 혹은 황제들을 경축하기 위해서 벌이는 운동경기 같은 일상적인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유대인들을 굉장히 거만하고 비사회적인 사람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와 반목, 그리고 편견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 했습니다. 특히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민족 이외의 사람들을 그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로 여겼으니까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중에서도 가장 꺼렸던 사람들은 바로 로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을 점령하고 성전을 더럽힌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유대인들과 이방인, 특히 로마 사람들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장황하게 설명해 드린 이유는 이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특히 상대가 로마의 군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런 관계는 더더욱 어려워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갈릴리 지역에 살던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이었던 베드로가 로마 군대의 장교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집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다는 것은 정말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사업가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이익 때문에 찾아간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은 특별히 유대인인 베드로에게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럼 없이 이방인, 그것도 로마 장교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 로마 장교는 베드로를 보고서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한 명의 경건한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물론 이것 또한 정말 엄청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 중에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던 유대인과 로마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편견의 담을 허물어 버리셨고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 만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엄청난 사전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적인 차이와 편견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서로를 향한 멸시, 그리고 유대인의 한 보잘 것 없는 어부와 그 유대인을 다스리는 로마 군대의 장교 사이에 존재하는 반감과 교만함들이 모두 허물어 져야 합니다.


원래 유대인과 로마인들은 두 개의 높은 산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유로 콧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로마인들은 그들이 가진 문화와 힘을 자랑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기만 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개의 산이 만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둘 다 봉우리를 깎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두 개의 산 모두가 서로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 이 두 사람에게 하셨던 작업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높이고 한 사람은 낮추신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를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로마 장교인 고넬료의 집으로 스스럼 없이 걸어 들어갈 수 있었고 고넬료는 그런 베드로가 나타나자 보잘 것 없는 유대인 어부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만남이 아무런 적대감이나 편견이 없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두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고 있으니 욥바로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오도록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넬료의 이야기로 보아서 그렇게 해서 그에게서 나의 메세지를 들으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할 무렵 베드로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하나님께서 속되다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그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욥바로 갈 수 있었고, 고넬료는 그런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고서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개의 높은 산을 모두 낮추셔서 복음이라는 낮은 자리에서 함께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환경이나 조건, 심지어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능력도 아닌 그 일을 맡은 사람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자아’라고 부르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깨져야 한다, 자아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우리가 이런 말을 사용할 때 우리의 감정은 가벼워 지기 보다는 굉장히 무거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아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의 자아가 깨지는 것을 무언가 손해 보고 아픔을 겪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집착해야 하고 꼭 지켜내야 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란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편견으로 인해서 내려놓고 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 그래서 다시 빚어지고 회복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망가진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깨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깨어질 때 비로소 원래의 우리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고 이렇게 자아가 깨지고 회복될 때, 우리 자신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가로 막는 가장 큰 장벽은 허물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말씀을 들려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고정관념을 고집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한 사람은 하나님께 크게 불순종한 자가 되었을 것이고 또 한 사람은 거기에 더해서 스스로 복음을 듣는 일을 거절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셨을 때, 두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그리고 로마의 장교라는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 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사람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할 사건은 바로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우리는 그 앞에 일그러지고 더럽혀진 자아를 내려놓고 다시 빚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이 있어야 나도 모르게 나와 하나님 사이에 쌓아 올린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빚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지만, 고넬료는 이런 겸손을 지닌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베드로가 오자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점령군의 장교가 식민지의 하층민에게 말입니다. 33절을 보시면 그는 자기가 베드로를 청한 이유를 설명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말은 고넬료가 왜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영접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그가 꼭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보인 태도는 베드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성경적으로 볼 때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그의 영혼의 태도 만큼은 나무랄 데 없이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은 그 모습 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지금 베드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고넬료는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베드로는 이미 복음의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를 만난 후에는 그런 생각이 완전히 깨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고넬료에서고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참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저 알고 있는 것과 참으로 깨닫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저 아는 것은 사람의 행동과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깨달아서 그 사람의 내면의 법칙이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날 고넬료는 베드로가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법칙을 삶으로 옮겨낼 수 있도록 해묵은 편견을 없애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복음,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구별이 없이 전해지는 복음을 참으로 복음 답게 전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차이점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복음 앞에서는 전혀 장벽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편견과 고정관념도 하나님과 복음 앞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주장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란 절대로, 그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하늘의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렇게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믿고 또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두 가지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깨지지 않는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알고 또 믿었고, 또 엄청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면서도 여전히 복음과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참된 깨달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이방인은 이방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그 편견을 완전히 깨뜨려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단번에 모든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들이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처리되는 데에는 긴 과정이 필요하고 또 그럴만한 계기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과정은 우리가 복음을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는 세속적이고 성경적이지 못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깨지고 부수어 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냥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과 행동을 하나 하나 바꾸어 갈 수 있는 참된 깨달음이 되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옳은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그렇지만’이라는 토를 달아서는 안됩니다. 이 말이 우리 입술에서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되지 않고 항상 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내 안에 남겨져 있는 찌꺼기 같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편견이 없는지 잘 살피셔서 그런 것들을 꼭 처리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과 생각까지도 복음적인 성도들로 계속해서 빚어겨 가기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을 깨뜨려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고넬료가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동시에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역할을 해 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뿌리깊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잘못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별로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보고 또 그래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불신자들이 읽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또 그들이 맡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하나님과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독교 자체와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는 편견은 그저 감정적인 것들도 있지만 사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생겨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불신자들은 교회와 하나님을 대적하며 폄하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과 반감을 만들어 낸 것도 우리들이지만 그런 편견과 반감을 없앨 수 있는 것도 우리들 밖에 없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편견과 반감을 무너뜨릴 만한 것이 될 때, 그들은 우리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진리도, 그리고 하나님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그리고 우리가 믿는 진리도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고집하며 세상이 우리에게 집어 넣어준 편견과 고정관념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가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속에 있는 온전치 못한 것들을 하나 하나 복음에 합당한 것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힘쓰고 헌신한다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영광스럽게 다시 빚어져 갈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우리 신앙에 대한 편견과 오해들도 함께 녹아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삶도 그렇게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복음 앞에 겸손하게 살아감으로써 내 속에 있는 편견과 사람들 속에 있는 편견을 녹여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또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