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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5.13. 새벽예배 - 하나님이 어찌하여(창세기 141)



창4226to38 - 하나님이 어찌하여(창141).pdf


20140513D (#1).mp3.zip





본   문 : 창세기 42장 26-38절




있다고 하는 막내동생을 데리고 오면 자신들의 결백함을 믿어 주겠다고 하는 요셉의 제안을 듣고 요셉의 형제들은 둘째인 시므온을 남겨 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관에 들러 나귀들에게도 먹이를 주려고 나귀 등에 실린 자루를 열었다가 요셉이 거기 도로 넣어둔 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25절에 나오는데요, 43장을 보면 요셉이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을 빌미로 다시 형제들을 잡아 넣으려는 속셈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선대한 것이죠.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전에도 한 번 간첩으로 몰려서 겨우 겨우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얻었는데, 또 다시 이번에는 곡식 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친 도둑으로 몰리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애굽이 자신들을 그렇게 몰아간다면 이번에는 정말 꼼짝 없이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고?” 이 이야기는 탄식과 뉘우침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질문이기는 했지만 사실 이 말은 질문이 아니라 “요셉의 일로 하나님께서 또 우리를 혼내시는구나!”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저 재수가 없다고 치워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잘못이 있을 때, 살다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항상 하나님과 연결 짓게 되고 훨씬 더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한 번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유익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신앙에 좋지 않은 영향도 많이 미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거지향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아얘 잘못을 하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과거에 붙들리는 일을 최대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집으로 돌아온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 했습니다. 당연히 야곱은 두려워 했구요. 그렇지만 야곱은 가장이고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참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도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 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느냐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절대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고 화가 나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서는 안되죠. 아들들도 지금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라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누려는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 자식들은 얼마나 상처가 되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말이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이 일이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래도 야곱의 아들들은 이런 어려움을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전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저 자기 감정만 이야기하고 그런  상황을 들고 돌아온 자식들만 원망합니다. 전혀 이 일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했던 어려움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일어나는 어려움들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야곱처럼 될 수가 있습니다. 그저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 감정에서 나오는 이야기만 쏟아내어서 또 다른 어려움과 상처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그런 적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상황의 어려움만 생각하느라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해서는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서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마구 쏟아냈던 적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지 없이 그 다음에는 저 스스로도 후회하고 또 가슴 아파했죠.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반응할 때, 우리는 항상 야곱같은 방식으로 밖에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유익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하는 그런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게 참 쉽지 않아도 남의 탓을 하고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기 보다는, 그게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항상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얻기는 힘들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도 유익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첫째 아들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베냐민을 다시 데리고 오지 못하면 내 두 아들을 죽이세요. 베냐민을 저에게 맡기세요. 제가 꼭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여러분은 르우벤의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것은 너무 답답해서 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이 말 또한 도저히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이야기 입니다. 분명히 큰 아들로서 가족 전체를 생각하고 하는 책임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속에는 얼마나 커다란 분노와 오랫동안 쌓였던 좋지 않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자기 감정만 생각하고 분노와 핑계를 쏟아놓자 아들도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그저 내 입장만 생각하고 내 감정에만 충실한 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도 똑같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교회가 어떤 상황이나  상태에 놓이게 될 때, 한 사람이 신앙적이지 않은 반응이나 하나님 없는 반응을 쏟아내면 금새 그 교회 전체의 분위기는 그렇게 되기가 정말 쉽습니다. 그래서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 첫번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그저 인간적이기만 이야기, 그저 현실적이기만 한 이야기, 그리고 원망과 핑계가 가득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교회를 섬겨 오면서 참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들이었습니다. 분명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누어지는 이야기들이 신앙적인 것이기 보다는 현실적이고 상식적이기만 합니다. 오히려 신앙적이고 영적인 이야기들을 하면 별로 관심이 없어 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현실을 전혀 무시한 채로 황당하고 무책임한 이야기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야기를 할 때도 걸러지지 않은 내 생각이 아니라 그런 입장에서 생각한 것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상황만 생각하고 자기 감정에만 빠져 이야기하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는 더 깊은 혼란과 상처, 그리고 불신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는데 많이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라도 먼저 이런 습관을 버리고 교회 안에서 부터라도 그런 모습을 떠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또 더 많은 혼란과 상처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경험하든 항상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상식적이고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입장만 생각한 말이 아니라 최대한 하나님을 생각하시고 또 함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셔서 덕을 세우고, 묶기 보다는 풀어주는 이야기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