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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5.14. 새벽예배 -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창세기 142)


창4301to15 -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창142).pdf


20140514D (#1).mp3.zip





본   문 : 창세기 43장 01-15절




첫번째로 애굽에 다녀오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애굽에서 사가지고 온 양식은 거의 바닥이 났고 그래서 또 다시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워낙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런 상황이 되는 동안 막내인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어떻게든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기근은 계속되고 있었고 둘째 아들인 시므온도 여전히 애굽에 붙들려 있었으니까요. 야곱은 아들들에게 양식을 다시 사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양식을 사러 가기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한 이야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유다가 나서서 다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아들들 탓만 합니다. 왜 동생이 있다고 해서 자신을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답답한 아들들은 그럼 가족에 대해서 조목 조목 따져 묻는데 어떻게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으며 그런 대답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지체하지 않았다면 두 번은 다녀왔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봉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의 근본이나 진짜 문제는 내버려 두고 잠시 덮어 버리는 것을 말하죠.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해결 보다는 미봉책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덮어 버리고 뒤로 미루고… 그러다가 결국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더 많은 상처를 입고서 그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더 풍성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성숙해 갈 수 있는 방법도 있고 그 방법도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내려야 할 결단이 너무 크고 또 근본적으로 예수 믿는 태도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쩍 안 그런 척 넘겨 버립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이어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게 결코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꼭 해결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신앙의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살아가는 내내 신앙의 참된 유익과 능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저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그런 상태가 계속되며 참 자유와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런 것까지 감수하고서라도 참 신앙을 갖기 위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참 신앙으로 가는 결단을 피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부끄러움과 민망함, 그리고 주님의 꾸중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가 참된 신앙을 가로 막는 문제를 만날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슬쩍 넘어가려는 태도를 문제 없다고 여기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은 나태한 것이고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단과 애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근본을 건드리고 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문제일수록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도 없는 문제처럼, 문제가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꼭 한 번 거쳐야 할 과정이라면 먼저 겪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유다가 만약에 이번에 갔다가 베냐민이 올 수 없게 되면 이번에는 자기가 볼모가 되겠다고 하고, 다른 아들들이 비난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가나안 땅의 특산품도 챙겨 주고, 돈도 두 배나 챙겨주면서 아들들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결국 이렇게 해서 야곱의 아들들은 다시 요셉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면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야곱의 원래 이름입니다. 사기꾼, 속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이죠. 그래서 성경이 야곱을 야곱이라고 부를 때는 그가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때, 그저 자연인으로서의 야곱을 부를 때입니다. 비겁하고 비열하며 욕망에 따라 살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일 때 성경은 그를 야곱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 그래서 항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승부를 내야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성경이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때, 특히 이렇게 갑자기 그 이름을 바꿔서 부를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때는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일 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야곱의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감정에만 충실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피하려고만 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남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쨋든 야곱의 입에서 신앙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아들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마지막으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라헬이 낳은 막내 아들인 베냐민에만 집착하고 다른 자녀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그의 머리 속에 갑자기 하나님이 생각났고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자 상황에 대한 태도,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태도가 갑자기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녀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만 가장 아끼는 한 자녀를 잃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한 사람 속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의 변화와 삶의 변화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지막 결단은 우리가 내려야 하지만 그 변화는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습니다. 야곱처럼 우리에게도 두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원래 우리 부모님들이 지어주신 이름과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에게 덧붙여진 성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둘 다 우리의 이름이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기를 원하시지 우리가 참 믿음을 갖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 이름으로 부르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되찾고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위에서 움직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진작부터 이스라엘로 불리워야 했습니다. 그는 계속 야곱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야곱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영광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조차 맛서서 살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성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에 걸맞는 태도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이름에 주어진 영광스럽고 당당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며,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성도라는 이름을 잊지 마시고 그 이름에 합당하게 믿음을 가지며 인생의 여러가지 문제를 당당하게 대면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도로 칭찬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