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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5.20. 새벽예배 - 그 아이를 대신하여(창세기 145)



창4401to34 - 그 아이를 대신하여(창14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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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44장 01-34절




잔치가 끝났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시므온과 베냐민을 포함한 모든 형제들이 식량도 넉넉하게 받아서 평안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막내동생 베냐민의 짐에다가 자신의 은잔을 넣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평안하고 돌아가고 있는 요셉의 형제들을 불러 세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의 청지기였습니다. 청지기는 요셉이 시키는 대로 그들을 마구 나무랐습니다. 어찌 선을 악으로 갚느냐고, 왜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도 자기 주인의 은잔을 훔쳐 갔느냐고 추궁했습니다. 야곱의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전에 자루에 들어있던 돈도 다시 가지고 왔는데 무슨 은잔을 도둑질 하겠느냐고, 만약 은잔이 나오면 누구의 짐에서 나오든지 그 사람이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장담합니다. 자신이 있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짐을 뒤지자 요셉의 은잔이 베냐민의 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증거가 나왔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다시 요셉이 집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끌려온 형제들을 추궁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친다는 것을 몰랐느냐고 말입니다. 그 말에 유다가 나서서 해명합니다. 증거가 있느니 결백함을 믿게 만들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결과라도 얻어야 했기에 유다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한 후에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만약 자기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그 충격과 슬픔으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기 때문에 베냐민은 꼭 돌려 보내야 한다고, 그러니 자신을 대신 종으로 삼고 베냐민을 놓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자기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죽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요셉이 다른 형제가 아니라 베냐민의 짐에 자신의 은잔을 넣은 것은 아주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베냐민이 어떤 의미를 가진 아들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냐민은 이유야 어쨋건 결국 아버지에게는 자기처럼 각별한 의미를 지닌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서 붙들어 놓는 척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형제들의 반응을 보려고 했던 것이죠. 사실 베냐민은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조금 애매한 관계에 있는 형제입니다. 이들은 시기심과 분노로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요셉을 팔아 넘기고 죽은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랬더니 야곱은 평생을 슬픔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일한 위로가 된 것이 막내아들, 그러니까 라헬이 낳아준 하나 남은 아들인 베냐민이었고, 야곱은 베냐민에게 더욱 집착했습니다. 이 일로 아들들은 야곱에게 요셉이 얼마나 각별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지만, 동시에 또 다시 베냐민에게만 집착하는 아버지와 막내 동생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히 유다는 집에서 떠나 올 때,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게 되면 자신이 대신 남겠다고 약속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진짜로 그것을 선택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이 대신 남겠으니 자신을 종으로 삼고 대신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고 또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베냐민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간의 일로 자신의 가족이, 특히 형제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붙잡았습니다. 야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어찌보면 편애를 받고 있는 베냐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는 것은 결국 야곱의 가족, 특히 자신의 형제들이 어떤 가족이 되어 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태도는 요셉이 정말 보고 싶어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요셉도 철이 들면서 자신이 형제들에게 했던 일들이 굉장히 후회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험악한 집안 분위기가 된 것에는 자기 책임도 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가장 먼저 형제들이 자신이 팔려간 후에 그리고 애굽을 오고가는 동안에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고 싶었을 것이고, 그것이 자기 가족을 어떻게 회복시켰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꾸몄던 것이죠. 그런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야곱의 형제들은 그 동안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자기가 밉다고 팔아넘긴 형제들이었지만 지금은 똑같이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베냐민을 되돌려 보내고 아버지에게 해가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나설만큼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일 보겠지만 45장을 보면 그것을 확인한 요셉은 정말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기뻐서 말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이었지요. 언론에 관심이 있는 국민들이라면 모두 기쁘게 들었을 소식이 하나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KBS 기자들이 세월호 침몰로 자녀들을 잃은 가족들을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세월호 침몰이 있기 전 한참 전부터 세간에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회자되었습니다. 이 ‘기레기’라는 단어는 기자라는 말과 쓰레기라는 말의 합성어 인데요. 그 동안 언론들, 특히 공영방송과 일부 신문사들의 기자들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들어 기울어진 보도를 일삼다가 얻은 불명예스런 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자들이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습니다. 한쪽 편에 착 달라 붙어서는 그 쪽의 대변이라도 된 양 왜곡되고 편파된 보도만을 내놓았습니다. 이 일 때문에 국민들도 엄청나게 화가 났고 유족들은 더더욱 화가 났습니다. 심지어는 유족들은 그런 방송국과 신문사들의 기자들이 들이대는 카메라를 빼앗거나 부수기도 했고, 그런 식으로 거짓말만 보도하려거든 나가라고 해서 유족들이 머무는 체육관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이 기자들이 그 동안의 자신들의 잘못된 태도를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그런 식으로 한쪽만 편드는 보도를 하지 않고 공정하고 정직한 기사를 쓰겠으니 자신들을 용서하고 믿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유족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 기사를 접한 국민들은 모두가 다 그 밑에다 응원한다고 기대한다고, 진작 그랬어야 한다고, 응원하고 지지할테니 꼭 변해달라고 댓글을 달아 주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이 사건 뿐만이 아니라 그 간의 자신들의 태도에 대한 통렬한 뉘우침이었고 그래서 국민들은 그들을 끌어 안아 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참 아픈 일이지만 그 아이들의 희생이 언론이 스스로 뉘우치게 만들고 그들을 국민들과 화해하게 만드는 치유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 열매를 지켜 보아야 하겠지만 그 기자들은 커다란 국가적인 슬픔과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뉘우쳤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일이고 바른 일입니다. 사람은 바깥에서 어려움이 오면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태도를 계속해서 고집하고 더 강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태도를 버리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뒤쪽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잘못을 저지른 후에, 그리고 그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록 아버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스스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좋은 것이고 이게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변해야 합니다. 사회도, 교회도, 성도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스스로 망가지고 변질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히 성도와 교회에 어려움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시거든 그 어려움을 내가 비뚤어지고 변질되는 이유가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고 온전해 지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도 회복되고 우리가 사는 교회와 사회도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파야 치유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항상 아픔과 힘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도구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