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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9.14. 주일오전 - 이것이 유월절이니라


출1201to14 - 이것이 유월절이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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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출애굽기 12장 1-12절




어떻게 고향에 많이들 다녀 오셨습니까? 우리 교회는 고향에 가신 분들보다는 고향이라고 찾아온 가족과 친지들을 맞이한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은데요. 이번에 제가 서울에 가 보니 추석당일날 사람들이 차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 귀가 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거리도 한산하고 동네도 조용했습니다. 실제로는 얼마나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명절 연휴기간 동안 총 3945만명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었는데요. 제가 찾아보니 8월달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5100만명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 모두가 고향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어마 어마한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한 번 이라도 움직인 셈입니다. 저는 다행히 역귀경이라서 갈 때 올 때 전부 다 막히지 않았지만 반대쪽 차선은 곳곳이 그야 말로 주자창이 되어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 지루함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고향을 찾아 가는 것을 보면 고향에 가서 부모를 만나고 가족을 만나는 일이 그만큼 기쁘고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서울에 한 번씩 다녀오면 며칠씩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비몽사몽이 되지만 그래도 고향에 가는 일은 전혀 귀찮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명절이 되면 저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저희 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이신데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월남하셔서 그 뒤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명절이 되면 고향사진을 꺼내놓고 눈물 짓곤 하셨습니다. 살아 생전에 고향 땅 한 번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셨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향이란 곳이 땅 보다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마련이고 요즘은 그 나마도 고향이라는 개념이 많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괜히 마음 따뜻해 지고 편안해 지는 곳이며, 항상 마음 한 구석을 거기 두고 살아가는 그런 곳인 것 같습니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는 편한 듯 편하지 않을 때가 있고 익숙한 듯 어색한 곳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자신이 나그네라고 느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년에 단 몇 번이라도 그 어색함과 불편함을 벗어 버리고 편안함과 익숙함을 누리고 싶어서 피곤함과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아 가는 것이겠지요. 


이번 명절에는 서울에 다녀오다가 문득 ‘고향’이라는 마음을 짠하게 하는 단어가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정말로 내가 돌아가야 하고 또 결국 영원히 살아가야 할 본향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타지 같은 곳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직전, 그러니까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예고하시고 그 재앙을 실행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유월절을 지내는 일을 그 때 한 번으로 끝나게 하시지 않고 1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키야만 하는 명절로 삼게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기뻐하는 명절입니다. 이 유월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첫번째 유월절에 이스라엘은 그렇게 함으로써 진짜로 장자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엄청난 구원이었지만, 그 열 번째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좋은 날에 빠지면 안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 날이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하고 기억해야 하는 날이니, 풍성한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잔치야 말로 이 날의 기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일이겠지요. 이 날은 그야 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만 하는 날이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양 한 마리를 남김 없이 먹어야 하니까요. 물론 먹다 먹다 남으면 그것은 불로 태워도 되었지만 원칙적으로는 일 년 된 양 한 마리를 모두 소비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월절 잔치를 벌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는 나중에 먹겠다고 남겨 놓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날은 그 무엇도 아끼면 안될만큼 기쁘고 넉넉한 날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이 들어 있는 달을 한 해의 첫번째 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유월절은 말씀드린 대로 구원의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새해가 될 때마다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곧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기억함으로써 한 해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유월절이 있는 달을 새해의 첫 달로 삼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한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잊을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그런 은혜의 경험이었습니다. 출애굽이 없다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구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유월절을 한 해의 첫 달에 가져다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유월절은 기쁨과 풍성함, 그리고 구원의 절기인 동시에, 기억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주신 이유는 유월절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기쁨과 풍성함 속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출애굽이라는 구원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유월절 당일을 위한 절기가 아닙니다. 유월절이 아닌 다른 모든 날들을 구원얻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들은 마지막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고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설날은 있고 추석은 있어도 정해진 유월절은 없습니다. 각자가 예수 믿고 구원얻은 때가 다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는 이미 유월절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유월절이 있습니다. 꼭 그게 언제다 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내가 예수 믿는 것이 확실하고 구원얻은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이미 유월절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예수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점입니다. 다른 것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들이 전혀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훨씬 못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예수 믿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이 우리를  그냥 지나치게 만들어 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에게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구원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구원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이라는 단어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과 새 생명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는 가장 좋은 단어이니까요. 


둘째는 우리는 항상 유월절 잔치같은 기쁘고 풍성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 또한 유월절 잔치 처럼 기쁨과 풍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족함이 없는 만족과 행복이 있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을 그저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형통한 삶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이 따라올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얻은 백성들에게 이미 허락하셨고 또 누리기를 원하시는 삶은 그 영혼이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찬 그런 삶, 그 마음이 은혜로 꽉 채워져 있는 그런 삶입니다. 주님은 구원얻은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유월절 잔치의 기쁨과 넉넉함으로 그림 그려 놓으셨던 것입니다. 항상 그 기쁨을 위해서, 그리고 그 풍성함을 누리며 신앙생활 하라고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유월절의 은혜 가운데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속에 넣어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얻은 백성의 복된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잔치같은 삶을 사는데 실패 했습니다. 이미 주신 복을 놓쳐 버렸습니다. 광야의 40년으로도 모자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런 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유월절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도들의 삶도 유월절 잔치 같이 기쁨과 풍성함이 넘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섞어 놓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되었던 삶이 그런 것이 아니었듯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허락된 삶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든 우리들이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으로 그 구원을 아는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그 복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우리들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얻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르심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른 모양의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몰랐을 때, 구원을 경험하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제 성경공부 모임에서 함께 묵상한 구절 중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구절만큼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의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성경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내가 살았고 예수님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나는 죽습니다. 그 믿음으로 나와 예수님이 연합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그랬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십니다. 나는 이제 내 맘대로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그림이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날이 가장 즐겁고 풍성한 잔치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잡아서 하나도 남기지 말고 배불리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치를 벌여 식사를 하는 방식과 복장이 잔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이런 기쁘고 풍성한 잔치를, 그것도 가족들과 함께 한다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습으로 잔치를 벌어야 할까요? 가장 편안하지만 특별한 복장으로 모여 앉아서 느긋하게 음식을 먹으며 즐겁고 긴 이야기를 나누며 잔치를 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먹으라” 전혀 잔치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월절 같이 기쁜 날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그것도 급하게 식사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기에 이상한 행동을 하시거나 혹은 우리에게 이상한 것을 요구하실 때는 오히려 거기에 정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상한 옷을 입고 급하게 유월절 식사를 하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복장과 식사 모습은 식사를 마치면 급하게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한 마실을 나갈 때는 띠를 띠지 않습니다. 지팡이를 짚지도 않지요. 그리고 급하게 여행을 떠나야 할 일이 없다면 급하게 식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옷은 그렇게 차려 입더라도 느긋하게 식사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식사가 급하게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하는 식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두 가지 모두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때 한 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매년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그런 나그네의 옷을 입고 급하게 식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그 은혜 안에서 기쁨과 풍성함 속에 살 수 있는 복을 허락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가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그 힌트가 바로 유월절을 지키는 모습 속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먼 여행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그러한 삶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복되게 살려면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해야 하고, 그런 태도로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아둥 바둥 그 목표만 붙들고 앞만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안전하게 거할 성을 쌓아야 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자기 목표를 이루고 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저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 같은 태도로 산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안전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고 또 그런 사고방식이 만들어 내는 그들의 실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삶으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복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나그네의 삶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항상 급하게 여행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심정과 태도로 살도록,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면서 그 안에서 복을 누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경쟁이 심한 세상을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그렇게 반문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여행이 어떤 여행인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나그네라고 해서 이 세상을 느긋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로 살라는 것은 내면적인 태도와 동기를 말하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나 하는 일이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다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거기 집착하고 욕심 내면서 거기 매달려 살지 않습니다. 나그네도 때로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의 영구 거주자가 아니라 여행자이니까요. 나그네의 목적은 여행하는 동안에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의 목적은 그 여행을 끝까지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간 과정에서는 조금 부족하고 조금 불편해도 거기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항상 자유롭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이 땅의 영구 거주자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지금 사는 그 곳에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가장 넉넉해야 하고 가장 편안해야 하며 거기서 모든 결론이 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평하고 화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욕심을 내면서 살아가고 그러면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를 못합니다. 


두번째로 나그네의 삶에는 나그네가 아닌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절대로 혼자서 여행하는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나그네는 하나님과 더불어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여행하는 그런 여행자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편하고 부족할 때도 있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여행하며 살고 있다는 마음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지난 번에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 했던 정기칠 목사님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서울에서 담임목회하다가 다 내려놓고 제주도로 선교를 떠나 정말로 선교하듯이 목회를 시작한 목사님입니다. 그야 말로 맨 땅에 헤딩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몸으로 섬기며, 또 한 사람 한 사람 양육해 가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요.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대책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야 말로 예수님처럼 누가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굶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힘들지 않고 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가끔씩 통화를 해 보면 그렇게 자유롭고 마음이 넉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있으니 얼마나 확신있고 당당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바보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목사님도 또 사모님도 이전에 서울에서 목회할 때보다 훨씬 더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그 날 설교 들으신 성도님들 그 목사님 보면서 그런 당당함과 평안함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그 목사님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그 목사님이 이 세상에 영구 거주자가 아니라 나그네가 되기로 했고 진짜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사나 하는 질문이 해결되셨습니까? 사실 그 두려움은 나그네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지레짐작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 진짜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로 산다고 해서 유월절의 기쁨과 풍성함을 포기해야 하 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복들은 나그네로 살아야 정말로 맛보고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의 삶을 잔치자리가 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틀림 없는 신앙의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거의 우리가 맡긴 그만큼만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10퍼센트만 맡긴다면 하나님은 그 10퍼센트만 책임져 주시고 나머지는 우리 힘으로 해 보라고 내버려 두십니다. 50퍼센트를 맡긴다면 50퍼센트만 책임져 주시고 나머지는 또 그렇게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맡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때는 하나님께 맡긴 부분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맡기지 않은 부분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그 때는 답이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맡기지 않은 것이니 그건 말 그대로 내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나에게는 사실 알아서 할 능력도 지혜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그 부분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삶은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나머지 90퍼센트의 자유, 50퍼센트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 계획’과 ‘자기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나그네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0퍼센트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하나님께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적어도 그렇게 맡긴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 부족하지 않게 채워 주시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어도 이상하게 평안을 누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내가 안달하지 않아도 다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시고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에게는 이것이 공염불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여행하면서 경험하는 현실 속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아무리 사랑하고 집착한다고 해도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도로 사는 일, 성도의 복을 누리며 사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자유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풍성함, 그리고 두려움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여행하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늘을 향해 여행하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유월절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은 우리는 나그네의 복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 되어 주시는 자유롭고 풍성한 삶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복으로 부름 받았는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따라 살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유월절 잔치의 기쁨과 풍성함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나그네의 기쁨과 풍성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