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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1.16. 금요기도회 - 성령과 우리는(사도행전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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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도행전 15장 22–29절




      오늘날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다분히 겉으로 드러나는 열정이나 혹은 은사, 그리고 능력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충만을 덧입으면 마음에 열정이 생겨나고 특별한 은사를 받기도 하고 그 은사에 따라서 없던 능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워낙 눈에 띠는 것들이고 그런 은사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어서 그렇지 성령충만하면 반드시 이런 것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성령충만함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 오셔서 행하시는 진짜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은 초대교회가 구원얻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예민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성령충만한 성도들과 교회의 모습이 많이 드러나 있어서 오늘은 그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진실로 성령충만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 끝에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의 경우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율법을 모두 지킬 필요도 없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보증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셨으니 그들의 구원이 유대인들이 얻은 구원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교회들의 중앙본부와도 같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야고보의 제안대로 이 문제를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정확하게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로 기록되었는데요. 우선 그 편지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들은 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합니까? 비록 율법이 유대인인 자기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너무 귀하고 꼭 지켜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이방인 성도들에게까지도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구원 얻은 이방인들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한 번 분명한 결론에 이르니까 다른 생각을 모두 내려 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끝까지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키라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견을 관철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 후에는 그 원칙에 순종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이방인들에게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첫번째 모습을 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정직합니다. 끝까지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강요하려 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요. 아주 작은 문제이고, 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인데, 정말 안 중요한 문제인데, 꼭 자기 방식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기 방식이 관철되어야만 마음이 편안해 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절대로 성령충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은 성령님의 소욕이 아니라 자기 고집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한다면 끝까지 자기를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고 그러면 성령충만할 수가 없으니까요.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말 한 마디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지금하고 있는 말, 지금 하려는 말이 과연 성령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 진리를 주장하는 것인지 내 생각과 취향을 강요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런 연습을 해서, 결국 그 연습을 통해 얻은 거룩한 습관들이 우리 삶 전체로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 연습을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는 더더욱 하기 힘들 테니까요. 자기 생각과 의견에 대해서 정직해 지는 연습, 그리고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연습, 또 내 생각에 맞다고, 나에게 중요하다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강하게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연습. 우리는 이런 연습들을 교회 안에서 아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연습을 통해서 성령충만함을 유지하시고 또 더욱 더 충만해 지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쓸 데 없는 일로 괴롭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했고,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23절에 보면 이방인 성도들을 “형제들”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같은 성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요구해야 할 것까지 다 양보했던 것은 아닙니다. 율법과 할례에 대한 커다란 원칙을 분명하게 밝힌 다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내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우리가 우선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태도인데요. 그들은 분명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도 그 태도가 정말 부드럽고 정중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확실히 맞는 것을 요구할 때는 태도가 거칠어지고 딱딱해 지기 쉽습니다. 물론 확실하게 맞는 것이니 꼭 따르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상대방을, 그리고  요구를 받는 사람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거나 무슨 일을 해 주는 일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배려와 존중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높은 곳에 두지 않고 최대한 낮은 곳에 두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해 주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때로는 신앙적인 권면을 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최대한 이방인 성도들을 존중하고 배려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자신들의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요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또 듣는 일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성도들에게 정당한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그 당시 교회들과 성도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항상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바른 길로 인도되어져야 하며 또 더 바른 것을 배우는 일을 통해서 더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 믿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번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성도들은 잘 배워서 그 방향에 자신의 생각과 삶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려면 반드시 그 교회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성령충만할 때, 그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한답시고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 성도들이 성령충만해야 바른 교훈을 들을 때, 그것을 거부하거나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 가르치고 성령을 따라 배우려면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가 다 성령님의 요구에 민감해야 하고 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이방인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공식적인 입장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급이 되는 두 사람을 선택해서 편지를 써서 그들 편에 보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서 사용하는 표현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첫째로 그들은 두 사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당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보다 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보기에는 완전히 정도를 걷는 사람들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결론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들은 두 사람의 이방인 선교보고를 받고서 그들에게 그렇게 최고의 칭찬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할 때, 속상해 하고 의기소침해 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또 그 사람들을 괴롭히기 까지 합니다. 자신이 성공하고 인정받을 때는 이런 열등감이 사라진 것같다가도 어느 순간 고개를 든 열등감의 포로가 되곤 합니다. 이런 열등감은 경쟁자들 사이 뿐 아니라, 친한 친구들이나 형제 자매 사이, 심지어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 또 이 세상을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순절 성령임재로 인한 부흥을 경험한 후, 이렇다 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바울과 바나바가 와서 이방인들 중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과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경우 상대방의 성공에 대해서 함께 기뻐해 주고 또 축하해 주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갑자기 깨달은 제 마음 때문에 크게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큰 교회에는 부교역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역자들의 능력이나 성품은 모두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떤 성도님이 제 앞에서 다른 부교역자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습니다. 제 기분이 어땠을까요? 솔직히 썩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교역자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그 분이 저를 욕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제 마음에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면서 저는 속으로 아차했습니다. 여전히 제 속에는 처리되지 않은 깊은 열등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 비교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거나 축하해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충만한 사람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인정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받을 때,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할 때, 그 성공에 대해서 진심으로 축하해 줍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교회의 특징은 성도들 서로 간에 질투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인정받고 칭찬받으면 그게 그렇게 배가 아픕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사랑받는 것 같으면 그게 그렇게 화가 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내가 먼저 인정받고 내가 더 많이 사랑받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해지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사람은 성공과 실패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귀하신 분이 자기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 있고 없음 때문에 기가 죽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과거에 대해서도 치료가 일어납니다. 현재의 충만함이 과거의 결핍을 충분히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의 가장 큰 축복은 ‘자유’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님 안에 거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얼굴이 좀 못 생겨도 괜찮구요. 키가 작거나 뚱뚱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남들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남들만큼 유복하지 못해도, 과거가 행복하지 못했어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지금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만유의 하나님이 자신을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도 거의 영향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기뻐해 주고 또 축하해 줍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삶, 자기를 먼저 챙기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성령충만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 일은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 혼자서 충분히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거나 복음 전도가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앞에서 정직한 사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정직한 사람,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비교의식과 열등감에서 진실로 자유로운 사람, 그래서 다른 이들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 주고, 다른 이들이 사랑받는 것을 함께 즐거워 해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영광스러운 사람은 성령님만이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래서 우리 속 사람을 새롭게 해 주시기 전에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없고, 가치있고 고상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얻기 전에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덧붙여진 것에 묶여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꼭 참된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때문에 참으로 부요한 사람, 그래서 성령님 때문에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 성령님 때문에 열등감과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운 사람, 성령님 때문에 기꺼이 다른 이들을 인정해 주고 사랑할 수 있는 참 성령의 사람이 되는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에 의지해서 그 쪽 방향으로 여러분의 삶의 방향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성령충만함의 참된 복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성령충만하여서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게 빚어져 가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