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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01.29.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출애굽기 22-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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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월 29일 목요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부분은 어제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일반적으로 ‘사회법’으로 부르는 부분과 안식년과 안식일, 그리고 절기에 대한 법,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언약을 맺는 장면과 그 언약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계시면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시는 앞부분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법은 일단 남에게 해를 입혔으면 정당하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법들이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사람이란 항상 자기가 남에게 손해를 입힌 것은 적게 갚아주려고 하고, 또 자기가 손해를 입은 것은 더 많이 배상을 받으려고 하게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면 이런 법들을 필요조차 없겠지요. 혹시 피해를 입혔으면 더 많이 갚아주지 못해서 안타까워 할 것이고, 또 반대 편에서는 적게 받으려고 애쓰겠지요. 그렇지만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항상 반대로 움직이기가 쉽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원수를 지고 서로를 해치는 일까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물질은 그저 잘 사용하고 누릴 뿐, 그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금이 가고 다툼이 생겨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시면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굳이 이런 법이 없다고 해도 물질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다투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기를 바라십니다. 손해를 입혔으면 넉넉하게 갚아주고 또 손해를 입었을 때는 그저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법이란 기본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지 수준 높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특히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이런 상식적인 수준을 잘 지킨다고 해서 절대로 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본 이상이어야 합니다. 용서에 너그럽고 또 용서를 비는 일에도 넉넉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더 큰 어려움과 상처가 되게 해서는 안되고 또 우리들이 손해를 입고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는 꼭 당한 만큼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수준을 벗어나서 너그럽게 용서해 줄 줄 아는 그런 속사람을 가꿔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배상에 대한 법들을 말씀하시다가 말고 무당이나 짐승과 행음하는 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절대로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죄를 바라보실 때, 결코 경한 것과 중한 것을 같은 것으로 보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수나 일시적인 욕심으로 저지를 수 있는 죄들과 악한 의도를 가지고 절대로 넘어서면 안되는 선을 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앞쪽에 속하는 죄들은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있지만 뒤쪽에 속하는 죄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이 사람에게, 그러니까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러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직접 손해를 입히는 것은 전혀 같은 죄가 아닙니다. 무당이 되거나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거짓된 것들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짐승과 행음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두 가지 그러니까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완전히 그것도 가장 악하고 추한 방법으로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는 정말 심각한 죄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 중에서 어떤 것은 경하고 어떤 것은 중한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한 것은 정말로 중한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낙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이상한 모양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공평과 가난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입니다. 법적인 공평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어 주는 것과 부유한 사람들을 편들어 주는 것이 똑같습니다. 둘 다 나쁩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작은 손해나 상처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난한 이웃들을 괴롭힌다면 그 사람에게는 불타는 분노로 다가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에 대한 법을 보면 그 안에도 역시 가난한 사람들과 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들짐승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도 보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그런 모든 것들을 자신의 잣대로 이렇게 저렇게 평하하고 나누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맞춰서 돌보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을 주신 후에, 그 법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머무시는 궁전과도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함께 계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당신의 나라를 만드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 나라가 완성되려면 백성이 있어야 하고 법이 있어야 하며, 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은 그 법대로 다스리는 왕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가려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삶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우리의 삶의 자리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서 번져 나가고 더 확고해 지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기도하실 때, 자신의 삶의 구석 구석을 한 번 살펴 보시고 그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원리대로 움직여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대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사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며, 그래서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