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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2.06. 금요기도회 - 성령이... 예수의 영이...(사도행전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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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6장 6-10절




제가 금요기도회를 통해 사도행전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기도를 함께 드리자고 여러분에게 요청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도와 교회는 반드시 성령충만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구해야 하는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충만한 모습이 너무 강한 인상을 주고 놀라워서 제가 그렇게 기도제목을 내놓을 때, 제 마음과 머리 속에는 성령충만함과 그런 겉으로 보이는 놀라운 모습들이 연결되어져 있었고, 내심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성령충만하게 해 주셔서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처럼 놀랍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교회, 한 번에 뭔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면 우리 속에서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또 급작스러운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들고 나설 것이고, 믿기로 작정된 자들은 교회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안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제가 사도행전을 설교해 나가면서 사도행전을 통해 보게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정말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증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져 갔는지 그 이야기 또한 놓치지 않고 들려줍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절대로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워낙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들이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어서 그렇지 가만히 사도행전을 묵상해 보면, 사도행전의 그 놀라운 부흥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해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신 일들이 사도행전에 그렇게 놀라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을 함께 공부하면서 절대로 놓치면 안되는 아주 중요한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바나바와 헤어진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로 건너와서 아직은 어린 성도들과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거기서 평생의 동역자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를 만났고 디모데와 함께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열매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이들의 사역을 통해서 믿음이 더 견고해져 갔고, 성도의 숫자도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과 교회의 신앙적인 성장은 함께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항상 이렇게 균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이 그렇게 보여주고 있듯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냐 하면 교회의 믿음이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새로 들어오는 많은 성도들을 양육하고 지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때 한국교회가 크게 실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외형적으로 확대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서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참 예수 믿는 사람으로 양육하는데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수가 갑자기 늘어나면 내실을 위해서 애써야 하는데, 교회는 오히려 그런 추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더 숫자를 늘리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교회들이 성도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목적을 되다 보니 그렇게 교회 안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든 교회 안에 붙들어 놓으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이렇게 해서 질적인 성장을 거의 포기한 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교회에 대해서 자꾸 어두운 이야기만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사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마치 너무 낮게 하향평준화된 좋지 않은 학교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보이는 병폐는 바로 그래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모습들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와도 교회와 목회자는 그들을 붙들어 놓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 사람이 남고 남지 않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렇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제대로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가 많아져도 그것 때문에 교회가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헌신으로 소아시아지역,  그러니까 지금의 터기에 있던 교회들은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원래의 성도들의 믿음은 견고해져 갔고 새로 복음을 믿게 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야 말로 최고의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거기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며 더 기쁘고 즐겁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돌보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때보다도 교회는 이 두 사람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이 그 지역에서 일하는 것은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더 이상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가로 막으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의미하는지는 잘 몰라도 한창 사역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을 때, 그리고 교회가 두 사람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그 때,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아 서셨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본문의 맥락상 이것은 상황이 어렵게 되었거나 복음 전도의 방해를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님께서 직접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신 것 같습니다. 원래는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내륙으로 들어가서 에베소로 갈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시자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의 경계를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의 터키 북부지방인 무시아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부터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그들이 그리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성령님과 예수의 영은 다른 영일까요? 그렇지 않죠? 성령님이 바로 예수의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연한 것을 우리에게 다시 일러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꾸 성령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다르다고 생각하니까요. 성령님은 성령님이기도 하시지만,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또 예수님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움직이시고 일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약시대에 성령님은 항상 복음과 함께 움직이십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며, 복음을 믿을 때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또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만 의지하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높이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고 또 지금도 성령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성령님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예수님과 상관없이 그리고 그리고 복음과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그렇습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자꾸 이상한 성령론에 빠져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더욱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더욱 더 순종하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디선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해지는 일들을 보시면 가만히 지켜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높여 지시는가, 그것 때문에 예수 믿는 믿음이 더 커지고 든든해 지는가,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더 바라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고, 처음에는 성령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일로 변해 버린 일이기 쉽습니다. 굳이 그런 일이나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가까이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님에 대해서 뭔가 헤깔리는 것이 있을 때마다 항상 잊지 마시고 성령님은 예수의 영이라는 것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별력이 생겨날 것이고 스스로를 보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로 가지 못하게 하시자 두 사람은 또 다시 방향을 바꿉니다. 무시아를 통과해서 드로아 항으로 갔습니다. 위쪽도 안되고 아래쪽도 안되니 그저 가운데 길 밖에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령님께서는 두 사람의 길을 막아서시는 대신에 아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밤에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울을 그 환상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마게도냐로 떠나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사도 바울은 가장 성령충만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런 사도 바울도 진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여러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참 이상한 것이 왜 성령님께서는 처음부터 바울에게 나타나서 곧바로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저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제가 신앙생활을 해 보니 항상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주 자주 깨닫게 됩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한참 신나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셔서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해서 무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던 것이죠. 그랬더니 거기 올 때까지 아무 액션을 취하지 않으시던 성령님께서 그리로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시아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실 거면 어디로 가라고나 말씀해 주실 일이지, 그냥 “안돼!”하시고는 아무 말도 행동도 없으셨습니다. 아래로 갈 때는 아래는 안된다고 하시고, 위로 가려고 할 때는 아래는 안된다고 하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러다 보니까 그 모든 지역들의 경계를 타고 결국 드로아로 갔고 거기서 성령님의 확실한 인도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참 낭비입니다. 효율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이 두 사람이 과연 그 길을 걸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지나쳐 가는 곳마다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큰 도시들은 아니지만 작은 도시들이나 시골마을들… 하룻밤 머물다 가는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작은 도시나 시골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집중력이 생기고 또 시간이나 노력의 낭비가 줄어드니까요. 그렇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기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처음부터 목적지만 생각하고 길을 간다면, 그 중간 중간에 나를 반기고, 나를 행복하게 하고, 또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많은 경험들과 풍경들과 사람들을 놓쳐버리는 것처럼, 목적만 생각하고 사는 삶에는 그 중간과정에서 해야 할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을 놓치게 되기가 쉽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여기서 부터는 앞으로 일곱 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오른 쪽을 세 발, 그 다음에는 뒤로 두 발… 이런 식으로 인도 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챙기기 위한 길이 아니라면 멀리 돌아가면서 그 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고 거기 자신의 삶을 맞춰가는 굉장히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시는 때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런 훈련을 시키시는 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단 한 번도 꿈을 꾸게 하시거나 무슨 소리를 들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의 삶이 모호하고 불투명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지는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면 그것이 결국 가장 유익한 선택이 되곤 하는 방식으로 저의 삶이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안에서 정직하게 선택하며,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며 사는 삶 속에는 전혀 해 될 것이나 손해가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고, 또 그 과정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다듬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목표와 목적만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일은 효율적으로 하게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 지는 훈련,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사는 훈련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천하의 사도 바울도 이렇게 헤맸습니다. 그러나, 헤맨 것이 아니죠? 이것이 바로 참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이 사는 법, 아니 오히려 더 성숙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법입니다. 사실 명확하게 보여지거나 들려지는 하나님의 뜻만 기다리다가는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이단의 우두머리들은 다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습니다. 그 시행착오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한 시행착오라면 그것은 시행착오가 아니라, 가장 명확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길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또 우리를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광현교회와 이 땅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온전히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갈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목적보다도 오히려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가장 하나님의 일답게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