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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2.04.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이사야 37-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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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2월 4일 금요일





이사야서의 처음부터 주욱 이어지던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끝나고 36장부터는 갑자기 이사야가 선지자로 사역하던 시대의 역사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기록은 바로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내용이 예언에서 갑자기 역사의 기록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공연되는 연극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먼저 연극대본이 쓰여진 후에 연극이 공연되듯이 먼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있고 난 후에 그것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습이나 우리 삶을 생각할 때, 항상 이것을 기억하고 또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가 앗수르에게 침공을 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8장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거나 아니면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지요. 그렇지만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비록 인간이 자기 의지로 선택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결국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게 마련이고 그 배후에는 어떤 모양으로건 항상 하나님께서 서 계십니다. 


앗수르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약한 나라를 침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서 유다를 징계하신 것이었습니다. 앗수르는 그저 하나님의 회초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고 유다의 역사가 그랬듯이 성도와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교회와 성도들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통제하지 못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믿어야하고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모든 일들을 그저 믿음 안에서 잘 받아들이고 겪어내면 그 모든 일들은 전부가 다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 됩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런 일들 속에 포함되게 됩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그저 그렇게 끝나 버리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일들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낙심하는데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는 그야 말로 기고만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유다를 협박하고 회유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 바깥에서는  앗수르에게 어떤 식으로든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유다는 그런 앗수르의 ‘말’ 정확하게는 ‘랍사게’의 말에 휘둘리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랍사게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으니까요. 이 소식이 그 당시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일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람의 ‘말’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을 징벌하셔서 죽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성 밖의 앗수르가 유다를 협박하게 되고 히스기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그들이 보낸 협박편지를 펴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또 앗수르를 벌 주시겠다고, 앗수르의 산헤립을 죽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진짜로 여호와의 사자가 하루 저녁에 십팔만 오천 명이나 되는 앗수르 군대를 전멸시켰고, 낙심한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섬기는 신전에서 아들의 손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히스기야의 수명이 15년 동안 연장된 이야기 입니다. 원래는 히스기야가 당장 죽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15년이라는 세월을 더 선물해 주신 것이지요.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 후에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살면서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들, 언론이 쏟아내는 말들, 또 책이 이야기하는 말들. 그 모든 말들이 우리 귀에 들려지게 될 때 우리는 그 모든 말들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받게 되고 또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우리가 어떤 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며, 또 어떤 말을 믿어야 하고 또 어떤 말을 따라 가야 하는지 그것을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들 때문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두려워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며, 근거 없이 들뜬 꿈을 품게 되기도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오늘 말씀 속에는 두 가지의 말이 서로 부딛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만 5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 밖에 진치고 있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사자인 랍사게의 말과 그 말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들려 주시는 말입니다. 상황으로 보면 이사야의 말보다는 랍사게의 말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고 더 힘이 있는 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그대로 성취된 것은 랍사게의 말이 아니라 이사야의 말이었습니다. 현실이 된 것은 산헤립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의 말도 결정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줍니다. 뒤에 나오는 히스기야가 치유를 받은 사건도 결국 확실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알려 주는 사건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귀에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가 다 절대적인 말들이 아닙니다. 그 말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 밖에 없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성경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단단히 붙들고 살면 그 이외의 그 어떤 말들이나 일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종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이고 틀림이 없는 말에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믿음을 묶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단단하게 묶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삶이 흔들리지 않고 우리 영혼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보이지 않으니 보이는 세상을 있게 하고 또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서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