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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2.13. 주일오전 - 향유 냄새가 가득하더라(2015년 대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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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한복음 12장 1-8절





오늘은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원래 절기상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에 속해 있는 주일인데요. 그렇게 보니 올해 성탄절도 이제 10일 남짓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누군가의 넋두리처럼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성탄절 분위기가 덜 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성탄절은 부풀려진 마음, 들뜬 마음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낮은 마음과 더 잘 어울리는 절기라서 오히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탄절을 더 성탄절 답게 맞이하고 또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성경이 들려주는 첫번 성탄절 이야기는 결코 화려하거나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박하고 따뜻하며 잔잔한 기쁨이 있을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라는 많이 가난하지만 겸손하고 경건한 두 사람을 부모로 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산할 변변한 장소도 없어서 베들레헴의 한 여관 헛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처음 오시는 순간부터 아주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성탄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탄생인 것은 하나님이신 분, 그리고 온 세상의 왕이신 분, 모든 만들어진 것들 위에 홀로 높으신 분이 그렇게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오신 그런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겸손이 내뿜는 찬란한 광채가 예수님의 탄생을 이 세상 그 어떤 왕이나 위인의 탄생보다도 영광스러운 탄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소식을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이나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들판에서 양떼와 함께 피곤한 밤을 보내는 목동들, 그 누구도 관심가져 주지 않는 낮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알리셨습니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스스로를 낮추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평범하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은 가장 높은 곳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탄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 우주와 만물을 구속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왕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다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 늦은 시간까지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는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들려졌던 것은 그 분은 그 어떤 낮은 사람들에게도 평강을 가져다 주는 왕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마음이 낮은 사람들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받아들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낮은 사람만이 자신을 왕처럼 높이지 않고 낮은 자리로 오신 왕을 높일 수 있을테니까요. 


오늘 성탄절이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높아져 만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더 높은 곳,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크고 더 화려한 것들에 마음과 생각을 온통 빼앗겨 버렸고, 스스로 왕처럼 살아가려는 욕망으로만 자신을 채워가고 있으니 낮고 겸손한 자리로 오신 하나님을 참 영광의 왕으로 맞이하는 그 기쁨과 평화를 놓치게 되는 것이겠지요. 올해는 성탄절을 기다리시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낮춰 보시기 바랍니다. 마굿간의 마리아와와 예수님처럼,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처럼 마음과 생각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성탄절을 맞이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도 첫번 성탄절날 낮은 자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맞이하셨던 마지막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가 사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들르신 것은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셔서 일부러 그 곳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셨고 마르다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 나사로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거실에 비스듬하게 앉아 계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습니다. 아주 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이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가 그것을 왜 들고 들어왔는지 몰랐습니다. 그저 값비싼 것이니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향유병을 들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밀봉되어 있는 병의 주둥이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향유 한 병을 전부 다 아낌 없이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처 놀랄 틈도 없이 마리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어 해치더니 그렇게 아직도 향유가 흐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졌습니다. 우선 첫번째 충격은 그 향유의 가격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 가격이 자그만치 300데나리온, 그러니까 그 당시 일용 노동자의 1년치 임금이 넘는 액수였으니까요.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그것도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다니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충격은 첫번째 충격보다 더 컸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당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었는데, 마리아는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질러 버렸으니까요. 그 당시 여인의 긴 머리는 그 여인의 영광이자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여성이 머리를 풀어해친 모습은 단 한 사람, 그 여인의 남편 밖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남자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에서 자신의 머리를 풀어 해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 당시 발은 머리와는 정반대로 가장 더럽고 부끄러운 곳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마리아의 행동이 얼마나 충격적인 행동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그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듯이 한 사람이 나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마리아를 나무랍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나선 사람은 가룟 유다였고, 그의 말에는 틀린 곳이 없었습니다. 특히 유월절 같은 명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로 여겼던 당시의 유대 풍습으로 볼 때, 그의 말은 너무나 고상하고 거룩하기까지 한, 정말 칭찬할 만한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마리아와 가룟 유다는 나드 향유 한 병을 가운데 두고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을 합니다. 먼저 상식의 기준으로 보면 마리아의 행동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겨우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일에 300데나리온, 그러니까 그 당시 4인 가족의 일년치 생계비를 날려 버렸고, 뿐만 아니라 많은 남자들 앞에서 여인의 순결과 영광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풀어 그 발을 씻어주는 어찌 보면 부도덕하게 여겨질 그런 일을 서슴지 않았으니까요. 반면에 가룟 유다는 금새 그 향유의 가치를 계산해 냈고, 그 돈을 어디다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귀하게 사용하는 것인지까지 생각해 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올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거의 틀림 없이 가룟 유다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마리아를 나무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지내지는 그 날 까지 그것을 그대로 간직하게 내 버려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해 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를 나무라서 마리아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움츠러 들거나 상처를 입게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룟 유다를 대표로 하는 거기 모인 제자들의 생각을 약간은 나무라시면서 이렇게 교정해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의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말씀인 즉, 어떤 일의 가치는 그 일의 옳고 그름이나 효율성 뿐만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한 사람의 마음이 결정할 때도 있는 것이며, 한 쪽에 대한 마음과 의무 때문에 다른 쪽에 대한 마음과 의무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의 가치, 특히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의 가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결정하게 됩니다. 때로 다른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보면서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석게 여기거나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 행동이 우리 주님을 향한 참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 주님은 그것을 가장 값진 것으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듯이 마리아가 그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으면서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향유를 바르는 일은 어떤 사람의 사후에 주검에다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그렇게 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만약 산 사람에게 그렇게 했다면 오히려 그 행동은 그 사람을 가장 심하게 욕보이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건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장례를 준비해 준 것으로 가장 귀하게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단지 예수님에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할 방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어쩌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처분해서 구할 수 있는 최고로 값진 향유를 구했겠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자 그 향유병을 들고 예수님께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 앞에 선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다 바를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귀한 분이셨으니까요. 마리아는 그렇게 귀하신 주님 앞에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귀한 향유 한 병을 물처럼 발에다 몽땅 쏟아 부었습니다. 쏟아 붓고 나니 수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중한 머리카락을 수건 삼아 향유로 젖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었습니다. 주저함도 없었구요. 그 일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마리아의 행동은 너무나 몰상식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그 비싼 향유를 그런 식으로 낭비했다는 점만 하더라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너무나 당연하게 마리아를 비난했고 그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왜 마리아와 그 날 거기 모였던 다른 사람들, 특히 가룟 유다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낭비이고 어리석은 일, 심지어는 비난받을만한 일로만 생각되는 것일까요? 이런 차이는 과연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여러분 저는요? 절대로 다이아몬드를 비싼 돈을 주고 사지 않습니다. 혹시 나중에 더 비싸게 되팔아서 시세차익을 남길 생각이 아니라 그저 가지고 있기 위해서라면 저는 절대로 보석들을 비싼 가격에 사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것들이 그저 다른 돌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여성동지들에게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보석이 있으면, 그리고 돈만 충분하다면 얼마를 지불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느냐가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가룟 유다 사이에 그런 조화시킬 수 없는 차이가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가치 판단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자존심이나 평판보다도 더 중요한 분이셨지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이미 모든 계산을 넘어 계시는 그런 분이 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에 그 값진 향유를 몽땅 쏟아 붓는다고 한들, 그리고 여인의 영광과 순결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풀어 그 발을 닦아드린다고 한 들, 그 일이 마리아에게는 한 없이 부족하게만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의 가치 판단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향유 병 위에 그의 눈에만 보이도록 새겨져 있는 삼 백 데나리온이라는 숫자만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최고의 귀한 분, 그래서 모든 비교와 계산을 넘어서 계신 분이 아니라 충분히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있는 분이었고, 심지어는 다른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가치를 지닌 분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청난 복을 받았으며, 살아가면서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내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보장받고 있지요. 뿐만 아닙니다. 영혼에 흘러 넘치는 기쁨도, 걱정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믿음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기적도, 이 못난 자아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특권도 모두가 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살았고 또 예수님 덕분에 지금도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예수님 덕분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영광과 온전함 속에서 말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발에 그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더러운 발을 씻어드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그렇게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은혜들을 거저 가져다 주신 우리 주님, 그리고 앞으로는 더 풍성하게 가져다 주실 우리 주님을 얼마만큼의 값어치로 바라보고 또 섬기고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대하는 모습은 마리아와 더 닮아 있는지 아니면 가룟 유다와 더 닮아 있는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얼마만큼의 가치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고 또 그렇게 향유를 발에 붓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계산하지 않은 마리아의 순수한 헌신을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로 받아 주셨습니다. 마리아를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메시야의 죽음을 준비해 준 사람으로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의 행동에는 또 하나의 엄청난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도중에 마리아의 집에 잠깐 들르신 것입니다. 그 도중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구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시지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그 분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마지막 목적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왕의 자격으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지만 왕이 되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하도록 되어 있었구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예수님께는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고 난 후에 유대 땅 안에 선지자는 사라져 버렸고, 제사장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발이었지만,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면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 드렸습니다. 만약 마리아의 기름부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대관식 없는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왕으로 오르신 왕의 보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때를 고난이나 죽음의 때가 아니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주었기 때문에, 십자가는 더욱 더 영광스럽고 온전한 예수님의 보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목회자인 릭 워렌 목사님은 일전에 설교 중에 자신이 돌보는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교회를 정말 사랑하십니까? 오늘 성도들 중에는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글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오늘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오늘 교회 안에는 가룟 유다를 닮은 사람들은 많지만 마리아를 닮은 사람들은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무한히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여러분, 그런 예수님이 우리를 계산하지 않고 사랑하셨고, 계산할 수 없는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보배로운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매순간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계산 없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계산할 수 없을만큼 귀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계산하지 않고 그 분을 사랑했고 계산하지 않고 그 분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해 드린 온 세상의 단 한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대관식에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홀로 온 세상의 왕을 왕으로 섬겨드린 오직 사람이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고 왕으로 높여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꼭 마리아를 뒤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귀하고 높으신 분이시기에 나의 전부를 드려 그 분의 발 한 번 적셔 드리는 일로 끝날지라도 그 일에 대해서 아깝다 어떻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그렇게 해 드려도 한 없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최고의 영광으로 그 분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닦아드린다고 해도 그저 기쁘기만한 마음, 그만큼 나는 작아지고 주님만 크게 여기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고 또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마리아를 흉내내며 살고 마리아를 흉내내며 우리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내가 너무 높고 또 내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주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보좌 위에는 나 자신이 앉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렇게 귀하게 여기며 산다는 뜻입니다. 그 기쁨과 그 영광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향유는 그저 옥합에 담겨 있을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런 향기도 발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 주님 왕으로 오신 성탄의 계절에 여전히 붙들고 있는 여러분의 옥합을 예수님의 발 앞에 깨뜨려 그 분의 발 위에 부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치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을 향유 냄새 가득한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주님 오신 이 계절, 우리 왕의 계절에 예수님 앞에 기꺼이 낮아져 그 분을 높이는 삶, 지극히 낮기에 지극히 높은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내 인생을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려 주시는 기쁨과 영광을 회복하는 우리들, 그렇게 내 인생과 이 세상을 향유냄새 가득한 곳으로 가꾸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