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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2.27. 주일오전 -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2015년 마지막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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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빌립보서 3장 10-16절



올해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51번의 주일을 다 보내고 이제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고 한 해가 한 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맘때쯤 되면 많은 분들이 한 해 동안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다가오는 한 해를 위한 계획과 목표를 생각하실텐데요. 해마다 그런 일을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우리가 목표를 세우는 일 자체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세운 목표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정말 그것이 목표로 삼을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힘쓸 때, 그 목표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의 ‘시간’과 ‘노력’ 그러니까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사용하고 또 우리에게 허락된 에너지를 다 사용하면 끝나는 것이고 보면 우리가 스스로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고 또 나 자신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우기 전에 그것이 정말 우리 인생 전체 혹은 그 일부를 투자하면서까지 이룰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곰곰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는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고,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도 많이 다릅니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 사람에게는 무료한 시간이 없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앞에 놓여지는 삶의 장애물이나 어려움을 대하는 태도도 다릅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장애물과 어려움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꼭 넘어가야 할 도전이라고 여기고 그래서 넘어서고 견디어 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더 분발하게 하고 더 애쓰게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산다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이나 목표, 비전을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목표와 꿈이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목표가 어떤 목표이냐, 정말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목표로 삼은 것이 사실은 목표가 될 만한 가치나 자격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내 소중한 삶을 낭비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 목표가 이루어 졌을 때,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주부들은 남편의 뒷바라지를 잘 하고, 자녀들을 최선을 다해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게 되고, 또 그 목표를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목표를 이루고 나니 허무합니다. 아이들은 다 잘 되어서 자기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편은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을 올려 보내고자 하는 곳에 보냈지만 아무런 만족도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년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것을 아는 다른 여자 분들은 자기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자기 인생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또 자기성취를 하기 위해서 더 많이 애쓰지요. 그렇지만, 결국 시간의 차이이지 그렇다고 해서 허무함이 그 사람을 비껴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허무함이 더 빨리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별 다른 의미가 없는 삶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어떻습니까? 재산과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뜁니다. 그러한 종류의 성공이 자신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말이지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목표는 이상하게 이루면 이룰수록 더 심한 갈증이 생기게 합니다. 게다가 성취감도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봐 줄 때는 뿌듯하지만 그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허무합니다. 또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더 커질 뿐 아니라 올라가야 할 더 높은 곳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럴 때 남자는 허무함과 더불어 산같은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왜 생겨날까요? 왜 사람들이 정하는 많은 목표들은 그 목표가 이루어져도 그 만족이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갈증과 허무함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정할 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않고서 목표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목표라고 하면 대개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라고 하면 자꾸 ‘무엇’에만 신경을 쓰고 자기 생각에,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무엇’을 목표로 정하지요. 그런데, 과연 인간이 그 무엇이라는 목표만 있으면 정말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인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고 심지어 성도들조차도 자기 인생의 목표를 세울 때 생각하지 못하고 그래서 계산해 넣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고 또 영원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몸도 필수적이지만 인간의 참된 본질은 영혼에 있고 그 영혼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표를 세울 때 어떻게 합니까? 일시적인 것, 그리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들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게 인생 전체의 목표이건 아니면 1년 동안의 목표이건 간에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고 또 영적인 존재인 것이 분명하지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계시지요? 저와 여러분이 영원하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뒤에 따라오게 되어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들만이 우리를 채울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것들만이 참된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현실적인 목표들은 일단 우리의 참된 목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현실적인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원한 우리 존재를 일시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 컵의 물을 먹고서 평생 목 마르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잠언 3장 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서는 평안함과 안정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일 수록 더 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려고 하지요. 이미 충분히 있는데도 더 많은 재산을 쌓아놓으려고 애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돈만큼 힘이 세면서 돈만큼 불안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불안한 것을 많이 쌓아놓는다고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많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일의 시종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에서 인생의 답을 찾지 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일시적인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면 그 때부터는 영원한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나라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 3장 11절 말씀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알려주는 귀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할 수 밖에 없고, 영원한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목표만이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고 만족하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표가 있는 사람은 목표가 다 이루어진 후에도 그렇겠지만 그 목표를 향해 가면서도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12절에 보면 그가 세운 목표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렴풋이 느낌은 오지만 뭔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은 이 말은 바울 자신에게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처럼 살다가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것을 자신의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예수님의 삶이 아름답고 숭고했고 그 분의 죽음이 멋지고 영웅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다가 그 분처럼 죽기를 원했던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지막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이르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의 삶과 죽음마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래서, 마지막에 주님처럼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보면서 가지게 되는 바람은 대개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를 본받기를 원하고, 그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처럼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의 관심의 초점은 이 땅에서의 삶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아무리 훌륭하고 고상해도 그것 자체로는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참되고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자신은 지금 계속해서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진행 중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너희가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은 결코 결론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의 시선은 전혀 과거를 향해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목표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지요. 그런 그에게 과거는 집착해야할 것도, 인정받아야 할 것도, 또 연연해 해야 할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건, 또 얼마나 뼈아픈 실패이건 간에 그것은 그의 발목을 잡을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사람이 과거에 매여 있게 됩니까? 왜 자신의 업적을 몰라준다고 섭섭해 하고, 자기 실패에 붙잡혀서 뒷걸음질 치는 삶을 살아가지요? 그것은 영원한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목표가 없으면 땅의 것으로 승부를 내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들, 결코 나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것들에 절대적인 가치를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지나간 것들에 매달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에게 과거는 단지 참고사항에 불과합니다. 성공의 기억은 감사하게 하고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참고사항이고, 실패의 기억은 앞으로의 삶에서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한 참고사항입니다. 자꾸 그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에게는 진짜 이루어야 할 영원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어떤 목표가 있습니까? 신앙 안에서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한시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것입니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면 우리의 참된 목표가 될 가치와 자격이 없습니다. 한시적인 것은 아무래도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주는 만족도 한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시적인 것들이 주는 만족과 행복을 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하게 하신 줄 아십니까? 계속해서 얻고 또 얻기 위해서 삶을 허비하라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중요한 귀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때, 어떤 약을 계속 먹어도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약을 찾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시적인 것에서 참된 만족과 평안을 얻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이 아니라 진짜 약, 그 질병을 완전히 고쳐줄 진짜 약을 찾으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꼭 그 약이 필요하고 그 약이 있어야 허무함과 불안함이라는 질병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는 것” 즉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 그래서, “하늘의 영광 속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목표가 영원한 것이었으니 그는 이 땅의 것들, 자기 자신의 성공과 실패 심지어는 삶과 죽음에도 묶이지 않는 넓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고, 그 위대하고 고상한 삶을, 그것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소망하는 삶은 무기력한 삶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저승만 생각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진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추측에 불과합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게 되면, 그 사람은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 하나의 일들과 내가 선택하는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순간 순간의 의미도 달라지게 됩니다. 땅의 것을 투자하여 하늘을 얻어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투자할 시간은 지금 살아있을 때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늘을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삶을 가장 열심히 그리고 소망넘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땅에 있는 것들에 묶이지 않고 영원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러면서 그가 집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소명을 이루어 감으로써 영원한 상을 얻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통해서 하늘의 영원한 상을 얻게 되는 그런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과 자신의 신앙을 분리시켜 놓고 생각할 때가 많은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을 큰 의미가 없게 만들고 능력 없게 하며 상급이 적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직업도 다르고 삶의 자리나 여건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같은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삶의 자리와 조건이 아무리 달라도 성도라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소명입니다. 우리 각자가 나눠받고 허락받은 직장이나 삶의 자리는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소명을 이루어 가는 장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영원한 목적을 품고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직장이나 삶 자체에서 성공하는데 중심을 두지 않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 소명을 우리는 일에 중심을 두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직업이나 일상생활, 그리고 사회생활들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면서도 삶 자체나 삶의 조건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유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일시적인 존재들이 아닙니다. 또 육체적이기만한 존재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하고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우리 자신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목적을 가져야 하며, 영적으로도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참되고 영원한 만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을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도 얻는 일거양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15년을 보내면서 내년의 희망사항을 생각하고 또 목표를 정하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년에는 꼭 여러분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얼마나 귀하고 고상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시고서 거기에 걸맞는 목표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실지 그것부터 생각하시고 여러분의 목표를 정해보시기 바랍니다. 직장생활을 통해, 일상생활을 통해 여러분의 몸만 만족시키는 것, 일시적인 만족을 주는 것을 얻고 이루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마시고, 꼭 무엇이 여러분의 영혼을 온전히 만족시키고 또 영원히 만족하게 할 지 그것을 먼저 생각하시고서 거기에 맞는 여러분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1년이라는 귀한 인생을 투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도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더 힘있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새해에도 참되고 바른 목적을 세우고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달려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새해에는 현실에만 매달려 있기 보다는 영원하고 영적인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2. 새해에는 나의 직장생활과 일상을 통해서 주님 맡기신 소명 잘 이루어 가게 하소서. 
  3. 한 주간 새해를 생각할 때에 가치있고 참된 목표를 발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