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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1.03. 주일예배 -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에베소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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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1장 1-6절





오늘은 2016년 새해의 첫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해의 첫번째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또다시 한 해를 기회와 선물로 받았음을 고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해를 주셨다는 것은 그 한 해를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함께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한 해를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잊지 말고 꼭 이 진리를 믿음으로 꼭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혹 힘들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 시간을 너끈하게 살아낼 은혜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그 진리에 거듭 거듭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2016년 한 해를 멋지고 담대하게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아내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믿음의 복을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새해부터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함께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호수아서 설교가 다 끝나갈 즈음, 다음에는 어떤 책을 설교할까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에베소서가 생각이 났고, 그래서 에베소서를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에베소서를 설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에베소서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책,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다분히 개인중심입니다. 그저 각개전투하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크게 상관 없이 자기 믿음을 지키고 또 성숙시키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분투는 반드시 필요하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대신해 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신앙이란 원래 개인의 일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라는 한 몸을 이루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고 또 서로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 받을 때, 교회의 교회다움이 회복될 수 있고 성도는 그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과 영광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믿음의 싸움을 싸우면서 그렇게 쉽게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은 그 개인에게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 교회가 성도들을 위해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잃어버린 이유가 더 큽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마치 자기 부대원들을 잃어버린 병사처럼 영적인 싸움에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단단해 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어머니인 교회의 가슴에서 좋은 젖을 받아 먹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하지 않고서 홀로서기를 하고 있으니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단단해 지는 것이 그리도 힘이 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항상 교회의 책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에베소서에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는 누구인지,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즉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통해서 그 분의 백성들을 만드셨는지, 하나님께서 그 성도에게, 그러한 교회에게 원하시는 모습과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장 집중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교회됨이 회복되고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교회에 속한 참된 유익을 누리려면 이런 것들을 배우고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거기에 반드시 교회를 향한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이 있어야 하고 성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대한 인격적이고 영적인 헌신이 있어야 하고, 또 책임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몸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성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들이 그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며 풍성한 삶을 누리는 일은 그 지식에 믿음과 헌신을 더해야 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살펴보는 일은 상당히 긴 여행이 될 것입니다. 함께 에베소서를 살펴 보면서 에베소서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동안 우리 교회의 교회됨과 우리 모두의 성도됨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크리스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얻은 우리의 새로운 이름인데요. 어떻게 보면 이 이름보다도 더 분명하게 저와 여러분을 설명해 주고 규정지어 주는 이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이름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우리들의 정체성이 예수를 믿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모두는 교회 속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따로 떨어져서 살아가는 고립되고 독립된 자리, 그렇게 외로운 자리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원으로 한 교회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광현교회, 동신교회”처럼 개별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말합니다. 이 땅에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교회의 총체, 그것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먼저 나를 한 개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전에 ‘교회’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전체 백성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특정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개 교회에 속해서, 그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어있다는 현실도 무시해서는 안되고 이것 또한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가져야 할 균형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아우르는 커다란 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는 지금 여기, 광현교회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교회를 이렇게 생각하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개교회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졌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교회됨을 많이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자기 교회만 생각하니 옆에 있는 이웃교회를 경쟁상대로 보고서 교회와 교회가 서로 경쟁하게 되었고, 그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절대로 서로 경쟁해서는 안됩니다. 류머티스라는 병이 있지요? 이 병은 흔히 관절질환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면역체계에 이상으로 생기는 질병입니다. 자기 몸이 자기 몸을 공격하는 것이지요. 백혈병이나 루프스 같은 병과 같은 류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의 지체가 자기가 속한 몸을 공격하면 그 몸이 과연 계속해서 건강하게 설 수 있을까요? 결국에는 몸 전체가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지금 한국교회가 이런 상태인 듯 합니다. 그런데,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조국 교회가 빨리 모두가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모습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섬기고 그 작은 교회가 더 작은 교회를 볼보는 모습. 큰 교회들이 자기 교회에서 양육한 성숙한 성도들을 약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파송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성도는, 그리고 교회들은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큰 그림도 그리고 있어야 하지만 작은 그림도 놓치면 안됩니다. 성도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힘을 다해 헌신해야 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자신이 속한 교회를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그 교회가 바로 전체 한국교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그린 그 큰 교회의 지체이고,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교회가 바로 자기가 속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그림 없이 작은 그림도 없지만, 작은 그림을 무시하고서는 그 그림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생각하건, 혹은 지역에 있는 하나의 교회로 생각하건 간에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교회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우리의 신앙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을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로 생각하는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표어는 “나만 잘 믿으면 되지” 입니다. 이런 분은 교회에 있으면서도 교회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믿음만 챙기면서 그것이 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리 저리 부대끼고 때로는 상처받고 그러느니 이렇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분들의 신앙은 바로 서기가 어렵습니다. 풍성해질 수 없습니다. 지체는 몸 안에 속해 있고, 그 몸을 섬기는 일을 통해서 자신을 세워나가게 되어 있다는 가장 간단하고 필수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만남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그게 빠지면 절대로 신앙이 신앙이 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관계와 만남도 교회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광현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동질집단이 아닙니다. 임의대로 자기 의지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 선택해서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모으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교회 속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여 가고, 온전한 한 사람의 성도로서 자리매김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렇게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기여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가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바로 광현교회 안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또 바램입니다. 


올해가 2016년이니 제가 결혼한 지 벌써 햇수로 18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 전에는 결혼이란 것이 그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둘만의 가정을 이루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 것은 결혼은 결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결혼은 분명히 저와 저의 아내가 했지만 결국 우리 집안과 제 아내 집안 사이의 일이 되는 그런 것이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양가의 부모가 모두 살아있는 경우라면 부모가 넷이 됩니다. 형제들도 불어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양쪽 집 모두의 자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싫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아내이니 나는 내 아내만 생각하겠다고 생각하고, 제 아내도 내가 결혼한 것은 장유진이라는 남자이니 나는 이 남자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만 신경 쓰겠다고 하면서 그 밖에 사람들이나 집안 일은 나 몰라라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저희 집안을 보고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아마도 “저 집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면 우리 두 사람은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절대로 그 관계가 가져다 주는 이익만을 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떠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것을 나누며 또 함께 책임진다는 뜻이지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교회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그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 신앙공동체에 속한 일원이 되는 것은 그 속에 속한 모든 일들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고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결단을 포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의 일에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다면 진정한 가족의 일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의 일에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교회의 지체가 되기도 힘들겠지만 마땅히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받아 누려야 할 풍성한 은혜와 기쁨도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흔히들 교회를 유기적인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참 멋진 말인데요. 그런데, 이 유기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에 속한 부분들 모두가 서로 뗄 수 없는 생명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 그런 관계에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점에서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과 하나의 생명체 안의 세포들처럼 연결되어 있지 않고서는 결코 진정한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네가,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또 이렇게 한 교회로 부르신 것은 그것이 우리가 성도가 되고, 또 ‘교회’가 되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 속한 사람이면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느냐? 그래야만 신앙인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신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모든 요구에 대해서 전부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이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인이 될 가능성은 그 만큼 줄어들 것은 확실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두 부류의 사람을 부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단 성도들이라는 말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개인을 가리킬 때는 그 무리에 속한 한 사람을 뜻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거룩’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분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섞여 있는 상태에서 섞여 있었던 것들과 따로 떼어 놓아지는 것.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섞여 있었던 다른 것들로 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섞여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로부터의 분리가 바로 거룩이지요. 하나님도 우리를 분리시키셨습니다. 어디로 부터요? 죄로부터, 그리고 속된 것들로 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두번째로 거룩함은 그냥 분리되어 있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항상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 내셨지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셨습니까? 왜 이렇게 이들을 거룩하게 하셨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냥 분리시키고 떼어 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거룩한 사람들로 구별하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입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분리되고 구별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우리들을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신실함이 성도가 성도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성품과 자질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런 불안한 마음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신다고 하시면 반드시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든든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하나님께서 세상의 잡신들처럼 예측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분이라면 우리는 절대로 그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신실한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처럼 신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녀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누구의 성품을 드러내야 할까요? 아버지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가장 기뻐하는 아버지를 닮아가며 그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이고 사랑스러운 성품이 바로 신실함입니다. 한결 같으시고 변함 없으시며 그래서 100퍼센트 믿어도 좋은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입니다. 바로 이 성품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과 안전함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들 또한 이 성품을 닮아가야 하고 우리를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반드시 신실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신실함이 거룩함을 지켜내고 또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과 기분에 따라서, 또 자기가 원하는 것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뜻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는 사람은 자신의 거룩을 지키며 지속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받은 그 귀한 거룩함을 금새 다시 더럽힐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도는 신실해야만 하고, 또 신실하기 위해서 애쓰고 헌신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실함이 우리의 거룩함이 기초가 되고 그래서 우리가 거룩함을 지키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구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신실함’이라는 이 소중한 단어를 여러분을 위한 ‘신앙의 화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처럼 신실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시고, 여러분이 삶과 신앙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런 은혜와 영광이 충만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살피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와 성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성도된 우리들의 헌신으로 인해서 교회다워지며 성도인 우리는 그 교회 안에서 참으로 거룩해져 가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 사랑하고 섬기게 하소서. 
  2. 신실하게 하소서. 하나님처럼 믿음직하게 하소서. 
  3. 나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함이 보여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