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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1.1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예레미야 1-2장)





설교일 : 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지난 주까지 우리는 이사야서를 함께 읽고 또 살피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사야를 다시 읽으면서 참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사야서가 그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그 사실 하나로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또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예전의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풍성하고 분명하게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반면에 정반대의 감정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예언서가 그렇듯이 이사야서 또한 사람들의 죄를 가감 없이 그대로 이야기하고 또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예언서가 그렇게 많이 설교되지 않습니다. 그저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은혜로운 본문들만 골라서 설교될까, 그런 말씀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보여주는 그런 부분은 거의 설교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언서를 설교하는 일은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그 설교를 듣는 사람 모두에게 굉장히 어색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그 예언서가 처음 기록되던 다잇에도 말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그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셔서 그에게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맡기는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요. 함께 읽으시면서 느끼셨겠지만 1장 전체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얼르고 달래시며 또 힘주시는 그런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너를 선지자로 세웠다,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처럼 되게 해 주겠다,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게 해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 믿어도 된다. 왜 이런 말이 필요했을까요? 그 당시 유다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또 심판을 경고하는 그런 말씀은 정말 듣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일이 굉장히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번 반복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예레미야가 경험하게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또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듣고 싶은 말씀, 나에게 은혜가 되고 또 위로가 되는 말씀, 들어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면 그 어떤 말씀이라도 들어야 한다는 그런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은 전해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모두가 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전하는 사람은 그다지 전하고 싶지 않은 말씀도 있고,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부담스러운 짐이 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들의 상태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또 듣는 일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프고 힘이 들어도 그 말씀이 고치라는 것을 고치고 버리라는 것을 버릴 수 있다면, 그 말씀은 그 때부터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복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 덕분에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가까이 다가 오시고 우리 편이 되어주시니까요. 


자녀를 키워보면요. 참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그럴 때가 자녀를 혼을 내는데도 혼나려고 하지 않고 버틸 때, 계속 자기 고집만 부릴 때인 것 같습니다. 혼을 내는 것은 더 나은 자리로, 더 바람직한 상태로 이끌려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반항하고 자기 생각만 고집할 때, 그 때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같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우리가 듣기 좋은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려고 할 때, 그리고 전혀 거슬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하지 않을 때, 혼을 내고 있는데도 전혀 혼나지 않으려고 할 때,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열려있는 귀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외면하거나 불쾌해 하지 말고, 아니 때로는 불쾌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귀야 말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알려주는 가장 명확한 기준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귀가 열려 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다시 회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마음이 아직은 굳어지지 않았다는 뜻이 될테니까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말씀을 들려 주시든 모두 들을 수 있는 그런 귀를 열어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귀를 통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항상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놓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