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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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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찬양을 기뻐받으시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그 기쁨의 표현으로 드리는 찬양을 기뻐하신다. 그런 찬양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 모든 찬양을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찬양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찬양을 드리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은 무엇을 기뻐하는가? 사람은 만족을 주는 것을 기뻐한다. 만족이 온전할수록 기쁨도 온전해진다. 그렇다면 찬양이 하나님을 기뻐함에 대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찬양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만족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의 기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
성령충만에 대하여... -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만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1. 하나님께서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최종적이면서 또한 최고의 복은 바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을까? 성도로 살아갈 때 부족한 능력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받게 하시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목적이었다면 그냥 단순히 그런 은혜들만 주셔도 그만일 것이다. 굳이 거창하게 당신 자신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그런데, 그 분은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당신 자신이시며 당신 자신의 영이시며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을 보내시고(성령님의 입장에서는 오시고) 우리 속에 내주하도록 하셨고 성령님은 지금 그렇..
처음에는 잘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래서 잘 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실력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똑똑해 지려고 노력했었다. 실력을 갖추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내가 보낸 시간들 속에서 그리고, 어느 누군가를 보면서 똑똑하다는 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력있다는 거... 그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것, 그리고 실력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될수도 있고, 다른 이들을 속일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완벽한 껍데기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욕망들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더 잘하고 싶고 더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말이..
다 맞는 말이지만.... 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 하나 없지만... 그 말들이 전혀 수긍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리 화자와 그 화자의 말을 구분하고, 그저 맞는 말을 맞는 말로 진리를 진리로 들으려 해도 그게 참 힘들다. 말은 그 사람의 삶, 적어도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의 뒷바침이 없으면 이미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기분나쁜 소음에 불과하다.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물론 누구라서 자신의 말대로 그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마는 부족함은 용서되어도 전무(全無)함이나 자기 삶에 대한 무지함은 용납하기가 참 힘들다. 사람은... 특히 말을 해야하는 사람은, 삶에 있어서 말하는 것의 비중이 높은 사람들은 그래서 적어도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의 능력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하나니 이 말은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 큰 감동을 느끼는 동시에 큰 중압감을 느낀다. 아마도 나는 절대로 그 말을 할 정도의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 그가 이 말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했을까? 우리가 이말을 들을 때 느끼는 것처럼 그도 이 말을 할 때, 중압감과 비장함을 가지고 했을까?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쥐고서 말이다.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 속에서 이 말을 했다고 확신한다. 그의 기쁨은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때,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나님의 목적..
너무 경이롭다. 은혜는 놀랍다. 갑자기 갑자기 믿음과 은혜가 생생한 현실이 되고 있다. 이 경이와 이 만족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당당함과 확고함을 어디서 왔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은혜라고 밖에는 기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어떤 기적이 이보다 더 놀라울 수 있을까? 단지 한가지만 믿었을 뿐인데, 단지 한가지가 믿어졌을 뿐인데... 장래의 은혜. 그저 그게 믿어졌을 뿐인데... 그것이 이토록 크고 놀라울 줄이야! 하나님. 제가 이 믿음을 평생 붙들게 하시고 목숨을 내놓더라도 이것을 택하게 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실로 생명보다 나음을 알게하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평생을 이 믿음가운데서 살게하시고 성도들에게 이 믿음을 말하며 가르치며 전할 수 있게 하소서. 그것이 제 평생의 소명이게 하소서. iP..
새로 열린 문... 예전에는 믿음 성장을 아랫 계단에서는 윗계단에 뭐가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었다(물론 윗계단에서는 아랫계단에 뭐가 있는지 다 보인다). 그런데, 그 생각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요즘 거기에 무언가 덧붙여야 비로서 맞는 설명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앙은 그렇게 위로 올라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옆으로의 지평도 그런 식으로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신앙은 단지 수준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닫힌 세상이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지며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과 연이어 넓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요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나의 믿음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고, 그래서 채워지고 더해..
목회는... 아이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제가 잘 아는 놀이였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것이 하도 예뻐서 가만히 앉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방법과 규칙이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는데, 원래 해야하는 방법에 따라 하는 것이 부딛힘과 쓸데없는 힘 낭비도 적고 그러면서도 훨씬 더 재미있는데 아이들은 같은 놀이를 하면서도 전혀 다른, 훨씬 재미가 없고 쓸데없이 힘 낭비를 많이 하는 방법으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제대로된 놀이 방법을 알려주어야 할까, 아니면 저나마도 재미있게 하고 있으니 "잘 하고 있다"고 그냥 격려해 주고 내버려 둘까? 제가 나서면 아이들은 놀이가 중단된다고 기분나빠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