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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2.07. 금요기도회 -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48)


행0910to19a -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4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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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9장 10-19절a




이 세상에 고난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신앙의 세계 안에서 고난이 전혀 없이 탁월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고통은 다듬어 지지 않아 여기저기 울퉁불퉁 삐죽삐죽한 우리 속사람을 다듬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끌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앙 안에서는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도 결코 불쾌하고 손해만 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한 일이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이 된 사울. 그는 잘 알다시피 정말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재능과 열정, 출신배경까지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던 장래가 촉망되는 차세대 유대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울을 그냥 그 상태로 불러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소명을 주시기 전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만 올라가고 있었던 그의 발목을 잡아서 가장 낮은 밑바닥으로 내팽개치셨습니다. 그 잘 나가던 사울을 바닥에 꼬꾸라 뜨리셨고 그의 눈을 멀게 해 버리셨습니다. 그 당당하던 사울, 모든 것을 가장 잘 분별한다고 자부했던 사울을 이제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경험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일은 사울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가 정말 하나님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불러 사울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사실 사울은 그 이전에도 계속 기도해 왔습니다. 바리새인이니 하루 세 번의 정해진 기도시간을 어겼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고 악한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계속해서 기도하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고 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기도는 자칫하면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자기 주장이 되고, 자기 생각을 더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울이 부드러운 방법으로 변화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얘 땅바닥에 패대기 치시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벌 주시고 또 내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 자리로 돌려놓으시고, 더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정말 하나님의 손에 꼭 붙들린 종다운 종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경험해 왔던 과거의 어려움과 고통들 또한 우리에게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를 바른 길로 돌아오고,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들이대신 하나님의 끌과 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부정적인 일들이나 고통들 중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상처만 주는 채로 남아 있다면 이제는 그런 일들을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진 여러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일들만이 아닙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새롭게 하시고 다듬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장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대시는 하나님의 정과 끌입니다.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아가서 미래의 고난과 고통들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런 경험들이 남기는 쓴 열매들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 존재와 삶을 통해서 달고 시원한 열매들을 보게될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낙심 가운데 금식하면서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환상 중에 아니니아라는 다메섹에 사는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다메섹을 지키며 기도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아나니아를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신실하며 그만큼 헌신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사람들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그의 귀에 들려온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그에게도 너무나 황당했습니다. 말씀인 즉 직가라는 거리에 사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가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울이라니! 하나님은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는가? 아마도 아나니아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가 그럴 줄 아시고 “그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아나니아는 다소의 사울이라는 이름에 얼어붙어서 그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예수님께 사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이 13절과 14절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건 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사울이 예수님께서 택하신 그릇이라니,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고 또 아나니아를 부르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사울과 아나니아는 정반대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모범생이었다면 사울은 그야 말로 통제불능의 문제아였습니다. 사람이라면 아나니아를 선택하고, 아나니아만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부르셨듯이 사울도 부르셨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을 회복시키시고 사울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사울을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부르실 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범생이든 문제아든,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든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그게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지금 당장의 모습,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보아서는 안되며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며, 그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께서 바꾸시고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누군가를 볼 때,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항상 하나님을 끼워놓고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소망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를 변화시켜 가시는 하나님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부르실 수 있고, 변화시키실 수 있으며 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우리 쪽에서 감당해야 할 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짐을 피하면 부르심은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사용되고 싶어도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15절과 16절이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15절입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정말 멋진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하실 때, 이방인들과 왕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그 소명을 담기 위해서 세워진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만 읽으면 사울은 앞으로 승승장구 복음을 전할 것 같습니다. 거침없이 승리를 얻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왕들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뒤에 이어지는 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우리 말 성경으로는 15절과 16절 사이에 별다른 연결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16절은 15절의 이유로 주어지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5절과 16절을 원래 의미를 잘 살려서 다시 읽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에게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울이 반드시 받아야 할 고난의 양과 그의 소명을 직접 연결시키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 바울이 후에 복음을 담는 영광스러운 그릇이 될 수 있는지는 그가 과연 하나님께서 그에게 담으시려는 고난과 어려움을 기꺼이 짊어질 것인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것은 골로새서 1장 23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인데요. 놀랍게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바울은 이 때 받았던 소명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명을 따라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가려고 달려오는 것을 알면서도 다메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에게로 갔습니다. 아나니아 또한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의 몫으로 주신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 속에는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몫의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으며, 불편함이 있으며 그 분량을 우리 삶이라는 그릇에 채우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의 본질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사회에서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상태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평판이 곧 복음의 평판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우리가 너무 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괜히 우리를 미워하고 따돌리고 무시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정말 좋겠는데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도 부르신 그 부르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부르심 속에는 구원과 은혜, 그리고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그릇에만 담겨질 수 있는 내 몫의 고난과 불편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것이 내 소명의 없어서는 안되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니 우리를 통해서 복음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고, 우리 자신도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성도 한 분이 “우리 정말 편하게 예수 믿는다. 이렇게 편하게 예수 믿어도 돼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편하게 예수 믿는 것, 정말 큰 복입니다. 핍박 없이 고난 없이 마음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복입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일은 별도로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편하기만 할 수가 없습니다. 편하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 몫의 고난과 불편함을 제대로 감당하고 않고 있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불편하고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내 몫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지 예수 믿으면 그저 편하고 좋기만 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이 그저 편하게만 예수 믿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편하게만 예수 믿으면 하늘의 영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그 영광스러운 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없는 고난 만들어서 당하고 필요 없는 불편까지 나서서 감당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우리 몫으로 주신 불편함과 고난을 애써 무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말입니다.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문제 있는 인생도 부르실 수 있고 고치시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서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속에는 분명히 예수 믿기 때문에 짊어져야만 하는 고난과 손해들, 그리고 불편함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 어른들이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고 불렀던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무시한다면 절대로 부르심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의 15절과 16절은 저에게는 너무 너무 은혜로운 단비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제 마음을 괴롭혔던 가시가 확뽑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난과 불편함이 소명에 더해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고난과 불편함 자체가 바로 소명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과 불편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부르심이 있다면 고난과 불편함도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불편함과 고난은 불쾌한 이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소명에 제대로 응답하려고 끙끙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혹시 내가 외면하고 있는 내 몫의 고난과 불편함이 없는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헌신이 내가 불편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목사로서 부탁 드립니다. 제대로 예수 믿고,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조금 더 불편해지시고 조금 더 힘들어 지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섬기시고 조금 더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 여러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영광이 있고 그래야 상급이 있습니다. 그래야 칭찬이 있고 그래야 참된 은혜와 기쁨도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조금 더 불편해 지고 조금 더 손해 보면서 조금 더 헌신하면서 그만큼 더 영광스러운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