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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3.30. 주일오전 - 다 예수를 버리고(마가복음 69)



막1433to52 - 다 예수를 버리고(마가69) .pdf


20140330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43-52절



제가 집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함께 보았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집사람하고 함께 보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건 절대로 아니구요. 그 영화가 참 여러가지 면에서 잘 만들어진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는 ‘팔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한석규 씨와 심은하 씨가 주연했던 멜로 드라마 였습니다. 그 영화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한석규 씨가 불치명을 앓게 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여정을 아주 차분하게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한석규 씨가 연기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기 싫어하는, 그러면서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그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정말 잘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석규 씨가 아직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인 영화의 거의 초입에 한석규 씨가 아버지인 신구 씨와 시장에 가서 생선을 구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생선가게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굉장히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카메라가 생선이 놓인 도마 위로 클로즈 업 되면서 칼이 물고기의 머리를 잘라내는 장면이며, 또 그 생선이 다듬어 지는 장면이 있는 그대로 그려지죠. 처음에는 그 장면에 그저 약간 표정만 일그러지고 무심하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왜 영화가 처음에 뜬금없이 그 물고기의 죽음을 그렇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물고기의 죽음이 그 영화의 큰 모티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그 영화가 죽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를 언뜻 언뜻 보여주는 이런 단서, 그러니까 이 영화 속에서 생선을 죽이고 다듬는 장면은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한 영화인지를 보여주는 ‘복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하나의 영화로 친다면 ‘복선’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장면이 아니라 그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인데요. 이 말들은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사용되기 전까지는 한 번도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적이 없었던 말들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과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적어도 유월절 만찬 이후부터 오늘 본문까지는 똑같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등장인물들은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은 제자들을 제자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을 그저 열 둘, 열 둘 중의 하나, 예수를 파는 자, 곁에 서 있는 자 그리고 한 청년이라고만 부릅니다. 이들을 제자들이라고 불렀고 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고 이름까지 정확하게 밝혀 주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굉장히 갑작스럽게 생겨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를 보고 ‘장유진 목사님’이나 ‘장 목사님’이라고 부르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장 목사’라고 부르거나 혹은 ‘장씨’ 혹은 그저 ‘그 사람’이라고만 부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저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이나 평가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라는 말은 항상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자들’이라는 말이 사라집니다. 그 대신 똑같은 사람들을 그저 ‘열 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름을 기록하는 대신에 ‘예수를 파는 자’,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 그리고 ‘한 청년’이라고만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 열 두 제자들을 바라보는 눈이 이 시점에서 심각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적어도 이 이야기 속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날, 적어도 그 이야기 속에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 앞에서 거창한 충성을 맹세했던 그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의 이야기 속에는 그저 예수님을 팔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사람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최고의 악역은 아무래도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스승을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온 대제사장들의 부하들에게 직접 누가 예수님이신지를 표시하는 암호까지 고안해 내어 알려주었고 그 암호대로 그렇게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까요. 특히 유다가 사용했던 암호였던 손등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당시 랍비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에게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했던 인사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장 큰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냥 스승을 팔아 넘기는 일만 해도 천인공로할 일인데, 그런 입맞춤을 자기 스승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도구로 사용했다니 우리로서는 참 경악할 만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유다의 예는 사람 안에 욕심이 들어왔을 때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안에 욕심이 들어와, 그 욕심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면 그 때부터는 그 욕심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고 그러면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도 이용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다른 사람들의 신뢰도 이용합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수단이 될 수 있고, 유다처럼 가장 깊은 사랑과 존경의 행위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자신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 일이 얼마나 악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이미 그 사람은 위에 두어야 할 것을 아래에 두고, 앞에 두어야 하는 것을 뒤에 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런 상태에 있다고 보셔도 될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이유는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가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유익보다 더 중요한 분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욕심이었건 아니면 학자들의 이야기처럼 이스라엘의 독립이었건 그는 항상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들을 이루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이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아넘겨도 될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룟 유다에 비교한다면 다른 제자들의 경우는 그래도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팔아 넘긴 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사람의 제자의 경우에는 나머지 제자들 보다도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곧바로 도망치지 않고 무언가 액션을 취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래도 성경은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은 유다를 말하면서 그냥 유다라고 말하지 않고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유다와 다른 열 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유다는 나머지 열 한 명과 전혀 다른 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비슷한 열 둘 중에 속한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열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열 한 사람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호하겠다고 칼을 들어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리치기까지 했습니다. 또 한 청년은 그래도 붙들려 가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예수님 곁에 있다가 칼을 들어 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리친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홑이불을 두르고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간 사람은 요한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사장의 부하들이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자 두르고 있던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그리고 베드로 또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몰래 일이 어떻게 되나 지켜 보았지만 결국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이렇게 열 한 사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발뺌하며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결국 조금 나아 보였던 두 사람의 배신은 먼저 도망쳐 버린 나머지 아홉 사람의 배신보다도 훨씬 더 부끄럽고 비열한 배신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열 둘’ 모두를 스스로 제자됨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신한 실패자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열 둘 모두를 하나의 실패담으로 묶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나머지 열 한 사람은 유다의 경우처럼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게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와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그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다투고 질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열 한 명도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죠. 결국 이 열 한 명에게도 예수님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에는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열 두 제자들의 실패담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가 더 악하다느니 누가 덜 악하다느니 하면서 평가를 하고 화를 내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지 저 열 둘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게 그 열 둘을 닮은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주님을 잊고 살아가며, 작은 유익 하나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 열 둘이 그랬듯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 얻는 것이 내 신앙의 목적이 되면, 유혹과 시험이 올 때 언제든지 넘어지고 실패할 수 있는 아주 위태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으며,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엇을 버리거나 손해보는 것, 혹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해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에게 집어넣은 생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의미는 있고 가치는 있을 지는 모르지만 고통스럽고 손해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가장 우리답게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그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어느 순간에도 이것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으며 사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신앙적으로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가 풍성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진리를 이해하고 또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성경이 예수를 믿기 전에 죄를 고백하며 떠나는 회개, 그리고 삶의 방향을 예수님을 향하여 바꾸는 회개를 요구하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단순히 죄가 나쁘고 이전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죄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던 그 삶 자체가 우리의 행복하고 만족한 삶, 원래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생명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가로 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 자체가 생명과 평안을 빼앗아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무겁고 어두운 것, 억지로 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복을 얻기 위한 사전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섬겨야 할 왕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통로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을 지키는데 모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며 또 버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잃어버리고 다시 그저 열 둘로, 예수님 옆에 서 있는 어떤 사람으로, 또 한 청년으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실패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끝일까요?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제 자리로 돌아갈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아마 그 당시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할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열 둘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며, 모두들 주님을 버리고 흩어져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목숨 걸고 맹세까지 했던 제자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도 알고 다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두 아시면서도 제자들을 이끌고 거기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제자들의 배반이 끝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애초부터 그런 제자들은 선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끌고 다니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비록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더라도 그 모든 실패들을 제자리도 되돌릴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27절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28절에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나를 버리겠지만 나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절망해도 나는 너희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가 어떤 곳입니까? 그 열 둘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또 제자로 부름받은 곳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벧엘로 돌아가자”라는 것인데, 이 열 둘에게 갈릴리는 꼭 야곱의 벧엘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로 먼저 가셔서 제자들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나중에 낙심한 제자들이 그 곳으로 돌아와 다시 고기나 잡으면서 살려고 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었고, 또 거기서 그들을 다시 불러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또 그렇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장본인이 되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계속해서 자신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무시했으며, 그래서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실패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에 대해서 말씀하는 성경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어야 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나의 약점으로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죄를 짓고 실패하게 되면 그 때는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이나 나의 실패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거기서 다시 나를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같은 죄를 반복하고 또 이렇게 커다란 죄를 지었는데 양심이 있지 어떻게 또 용서를 구하냐구요? 그런 질문은 굉장히 양심적인 것 같지만 실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바라보아야죠. 그러니까 다시 주님의 약속으로 돌아가야죠.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고 방법이 없으니까요.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그들이 그렇게 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라면, 또 그런 그들을 위해서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기다리셨고 또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짓는 그 어떤 죄인들 용서해 주시지 못하시겠습니까?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30대 초엽, 길게 잡으면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저 스스로에게 너무나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결심하고 깨뜨리고 결심하고 또 죄를 짓고… 이런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정말 하루에도 여러 번씩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생각에 빠져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이렇게 실패하고,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주님을 뵙나 생각했고, 결심하고 싸워도 안되니 그냥 되는 대로 살자고 생각했고, 그래서 죄를 지어도 일부러 고백조차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적도 많았습니다. 고백해 봤자 고통스기만 하고 또 다시 그럴 것이 뻔했으니까요. 사실 그것은 의지가 너무도 약한 저로서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고도 황송하게도 하나님은 그런 저를 심하게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받아 주시고 또 받아주셨으며, 먼저 찾아와 회복시켜 주시고 오히려 마음에 더 큰 은혜까지 부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가 제 속에 갖혀서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고 그럴 수록 더욱 더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약속을 믿고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요즘 가끔씩 의지가 굳고 분명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참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속으로 웃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 우습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아 생전에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낙심하기를 거듭했던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물론 저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열 둘 중 하나처럼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 나라는 사람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잠깐 실망할 때는 있지만 계속 거기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저를 먼저 받아주시고 또 먼저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고 또한 악함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피조물이고 죄인인 것이 우리들이니까요. 우리들 모두에게는 열 두 제자들의 본성이 숨어 있으며, 또한 그것 때문에 죄를 짓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실패가 그리고 우리의 범죄함이 곧 끝은 아닙니다. 그 실패가 아무리 심각하고 그 범죄가 아무리 크고 깊어도 우리 주님은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은 바로 그렇게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또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아무리 범죄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절대로 먼저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손 내미실 때, 그 손을 뿌리치지 마십시오. 먼저 가서 기다리시겠다던 그 약속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찾고 또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또 더 온전하게 빚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실패와 범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래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예수님을 버리는 것같은 실패를 경험하시고, 그래서 마치 자신이 믿지 않는 자로 돌아간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주님 만큼은 기억하시고, 그 분의 은혜 만큼은 놓치지 않는 은혜를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과 은혜 가운데 더욱 더 온전하고 거룩한 주님의 제자로 빚어져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