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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4.06. 주일오전 -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마가복음 70)


막1453to65 -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마가7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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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53-65절



만약 여러분이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이래서 부족하고 이래서 참 못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을 위로하고 편들어 주는 대신에  “그래 맞다. 넌 딱 그런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니? 넌 정말 대단하다.” 라고 맞장구를 져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분명히 그 사람은 정색을 하며 여러분과 싸우려고 들거나 아니면 다시는 여러분을 보려고 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든지 간에 누구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너는 그 정도면 참 괜찮다, 충분히 선하고 착한 사람이다.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그 반대의 이야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기독교의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진리입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만 나오면 굉장히 불쾌해 합니다. 그래서, 요즘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싹 뺀 다음에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절대로 죄인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미국 최고의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이나 그 유명한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쓴 조엘 오스틴 같은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싫어 한다는 이유로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 이야기 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예수님도, 그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전혀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또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 안에 악함과 죄를 지을 가능성을 품고 있는 죄인이며, 죄의 쓴 열매들 때문에 고통당하며 사는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싼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데요. 놀랍게도 이 십자가가 인간의 죄를 처리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선하고도 유일한 해결방법이었지만 이 십자가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들은 오히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악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간인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 보기에 유익한 거울이 되어주고 또 타산지석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경고와 포기할 줄 모르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신했고 예수님을 팔았으며 그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충성스럽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저마다 목숨이라도 걸고 예수님 곁을 지키겠다고 장담하며 경쟁하던 그들이 그 가능성이 사라져 버리고 위험이 닥쳐오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람 안에 있는 이기심과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라는 악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붙들린 예수님께서는 한 밤중에 공회 앞에 서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증거를 찾되 찾지 못하니…” 공회에서 벌어진 재판은 전혀 공정한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공정하고 올바른 재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의 재판은 이미 “예수님의 처형”이라는 목적을 정해 놓고 시작된 그런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재판이란 유죄와 무죄를 결정해 놓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형벌을 정해놓고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날 거기서 벌어진 재판은 그랬습니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판결이 먼저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데려왔고 또 예수님을 상대로 재판을 벌였습니다. 그러니, 그 재판은 그저 예수님을 죽일 이유만을 찾는 그런 재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악하고 그릇된 목적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거의 항상 거기 모였던 공회원들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들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물론 그런 모든 방법들은 다 적절한 것들이 아닌, 부당하고 불법적인 것입니다. 그저 힘으로 그 사실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목적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 정당하고 바른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이 정당한 목적이 아닐 때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 또한 바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죄악이 끼어들어올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목적 자체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 버릴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목적이든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절대적인 목적이 되어 버리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죄악은 끼어들게 마련이고, 그것이 나의 인생과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고 할 때는 그것이 정말 가치있는 목적인가, 꼭 이루지 않으면 안될만한 그런 목적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며, 또한 분명히 가치가 있는 목적이라면 그 목적의 가치를 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목적을 올바른 방법으로 추구해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적이 나의 인생과 이 세상을 모두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증거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거기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을 죽여야 할 증거를 들이댔습니다. 모두 거짓 증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들은 서로 서로도 일치하지 않았고, 그래서 증거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짓이 무엇입니까? 거짓은 실체가 없는 꾸며댄 말이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서로 맞을 래야 맞을 수가 없습니다.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 이야기들이 서로 맞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 자기가 이전에 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해서 자꾸 스스로도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이야기이니 보고 경험한 것이 없어서 그 기억이 오래 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가 자꾸 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자기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거짓은 진실과 함께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거짓 끼리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만약 이들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라면 예수님의 사형은 정당한 것이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들이 들고 나온 증거는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이들의 주장은 사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야기 하고는 반만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사흘 만에 이 성전을 다시 세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을 내가 헐고…”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가 성전을 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전 모독죄가 됩니다. 그러나, 그저 “내가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다”라는 말은 전혀 성전모독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사형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들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내 손으로 헐고…”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듣지도 않은 이야기를 꾸며내서 그것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나로 혼합해서 증거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때로 통째로 거짓인 것보다 더 악한 것은 반쪽 진리, 거짓과 섞여 있는 진실입니다. 이것은 악한 것을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들어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려고 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자기 합리화를 굉장히 나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사용하는 논리들은 가만히 들어보면 그것 자체로는 그렇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자기 합리화란 결국 맞는 이야기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잘못 자체보다도 때로는 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잘못을 저지른 것보다도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것을 더 심각한 잘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저지른 잘못 위에 또 다른 악을 하나 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서로 다른 거짓 주장을 펼칠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저는 궁금하기도 하고 또 이상하기도 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거짓 증언이 난무하는데 그저 듣고만 계셨을까? 아얘 한 마디도 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던 것일까? 나중에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정확하게 대답하셨던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제 궁금증에 대한 답은 아니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거짓말은, 그리고 반쪽 짜리 진실은 예수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갑자기 시편 1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들 자체가 주님께는 바람에 나는 겨처럼 가볍고 가치 없는 존재들이라면 그들이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들, 그리고 거짓과 혼합된 반쪽 짜리 진실들은 또 얼마나 가벼울까?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든다고 해도 예수님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니 말이 아닌 말, 전혀 무게도 없고 가치도 없는 그런 말에는 대답조차 하실 필요가 없다고 여기셨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저 자신의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분명히 거짓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아마도 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했던 정말 중요한 진실은 숨기고 있는 반쪽 짜리 진실, 그리고 나를 옳게 보이려고 사용한 자기 합리화도 굉장히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말들은 예수님께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볍고 가치 없는 말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의 말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었던 들 그것이 주님께 어떤 무게와 가치를 지니고 있었겠습니까? 적어도 그런 말들을 사용하는 순간들 만큼은 하나님 앞에서의 저의 무게는 바람에 나는 겨처럼 가벼웠을 것입니다. 


거짓으로는, 진실과 적당히 섞인 반쪽 짜리 진리나 자기 합리화로는 절대로 우리 주님의 의미있는 반응이나 지지를 받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 어떤 훌륭해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 내더라도 주님은 그것에 대해 감동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본문의 거짓 증언들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에서 그런 교훈을 얻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만 기뻐하십니다. 진실에만 반응하시고 정직에만 지지를 보내 주십니다. 비록 잘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그 때도 다시 진실과 정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짓과 자기 합리화로 잃어버렸던 우리 자신의 무게를 되찾고 주님의 든든한 지지를 받는 묵직한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이제 무대 위에 클라스가 다른 악역스타가 등장합니다.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그는 답답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예수님은 이 질문에도 침묵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이 아주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정말 대단한 질문입니다. 물론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만 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이 질문을 피해가질 않으셨습니다. 정확하고 틀림없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질문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인지 모르셔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것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면 그저 “내가 그니라”라고만 말씀하셔도 충분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 뒤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이 말이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이야기였습니다. 권능이란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편이란 그 대리자의 자리이구요.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은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고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뜻이었고,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답을 듣자 마자 대제사장은 그 비싼 옷을 찟으면서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 없다고 말했으며, 공회는 만장일치로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명확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필요 없는 말,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쓸 데 없는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는 위험 속으로 몰아넣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조금이라도 더 앞당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들의 악함을 부추긴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들의 무지와 분노를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선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사실 원래의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후에 지옥에 내려 가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워낙 이상하게 생각될 여지가 많은 구절인지라 혼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빼 버리고 외우질 않지만 사실 이 구절을 빼버림으로써 한국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아주 중요한 고백 한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이 비슷한 내용이 베드로 전서 3장 19절에 나오는 데요 거기에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략된 사도신경의 내용과 이 구절을 합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빠져 계셨던 삼일 동안 영으로는 지옥에 가셔서 이미 죄로 멸망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지옥에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일까요? 저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지옥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진 예수님이 온 우주의 왕이라는 선포이니 지옥에도 그 소식이 들려져야 하니까요. 둘째로,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미 멸망한 영혼들이 복음을 듣는다고 회개하고 돌아올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은 이미 멸망당한 자들일지라도 그들에게서 복음을 들을 기회마저 박탈하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복음을 들려 주셨던 예수님이시라면 아직은 회개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을 쉽게 포기하실 수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 날 공회 안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메시야를 죽이려고 공모하며 벌 떼처럼 달려들어 거짓으로 모함하는 그들에게, 사악한 질문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하는 그 대제사장에게 사랑이신 예수님은 복음을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네가 찬송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비록 이 질문이 예수님을 꼼짝 없이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사악한 의도가 담긴 질문이기는 했지만, 이 속에는 온 우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여느 왕처럼 화려한 왕궁을 만들고 번쩍 거리는 왕좌에 앉아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려는 그런 왕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왕좌는 십자가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목숨을 내어 주심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심으로써 왕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온전한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왕이 되셨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인간의 악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이란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습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 스승을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에게 위험이 닥칠 새라 스승을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라도 도망쳐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미리 악한 목적을 세워놓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이라도 선택하는 악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또한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자기 입으로 “네가 찬송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 놓고,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한 대답을 들어놓고도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입니다. 이렇게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악함 때문이든 무지 때문이든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고 또 이 세상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이며, 그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그렇게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이 더 바른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 더 살만한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이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선함과 지혜를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악함이 만들어 내는 어려움과 비극들을 해결할 길이 없어지고 맙니다. 


저는 요즘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오히려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저같이 열등감과 자괴감이 심했던 사람이 이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입니다. 저에게 이런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저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더 열심히 찾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메꿔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열등감과 자괴감이 있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내가 나를 믿고서 나로 충분한 삶을 살아 보겠다고 하다가 실패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열등감과 자괴감은 나 자신에게 집중해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부족함 때문에, 사람들의 악함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이 지닌 불완전함 때문에, 오히려 그만큼 더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과 자괴감, 그리고 삶이 만들어 내는 온갖 상처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 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그 죄때문에 생겨나는 무지까지 모두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짊어지신 죄와 연약함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가 없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공회원들의 거짓 증언, 부정직함과 교활한 모의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무지함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악함과 연약함을 다 아시면서도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고 또 죽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믿지 못하고 또 나 자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니 우리는 그 분을 우리 인생의 왕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그 분이 우리에게 해 되는 일을 하실 리도 없고, 또 해 되는 것을 요구하실 리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자신의 부족함과 악함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죄악과 악인들을 보면서 너무 절망하고 너무 큰 분노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사람은, 그리고 세상은 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도 아니고 또 결코 선한 것도 아니지만, 사람은 죄인이고 세상은 그 죄인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삶의 자리이기에 사람도 세상도 그런 모습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죄인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부족함을 매꿔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부요함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충분함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세상의 죄악들과 그 죄악들 때문에 일그러진 모든 것들을 가장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전부 바로 잡으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완전한 왕으로 오시는 날은 분명히 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불완전한 세상을 보면서도 여전히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자신을 의지하지 마시고 그 주님께, 우리의 왕,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과 믿음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 완전해 지는 것을 보지 못해도, 또 우리가 완전한 사람들이 되지 못해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충분할 수 있습니다.이런 믿음과 소망으로 죄 많고 완전하지 못한 세상에서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