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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3.25. 새벽예배 -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사순절 4-2)


9. 마2201to14 -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pdf


20140325D (#1).mp3.zip






성경본문 : 마태복음 22장 1-14절



오늘 본문은 아주 아주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벌여놓고 하객들을 청한 왕의 비유죠. 왕은 잔뜩 기대를 가지고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청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기를 싫어합니다. 분위기를 보아서 이 사람들은 잔치를 시시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왕은 다시 사람들을 보내서 그 잔치가 어떤 잔치인지 설명합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그 잔치는 왕이 자신의 가장 좋은 짐승들을 잡고 부족한 것 없이 준비하는 잔치, 게다가 아들의 혼인잔치가 될 것입니다. 왕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잔치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왕은 그 의미와 잔치를 준비하는 자신의 기쁨을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들은 척도 안합니다. 사람들은 종들이 그렇게 부르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하러 가고 이상하게도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초청하러 온 종들을 모욕하고 죽여버립니다. 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행동들은 자신과 자신의 호의, 그 잔치를 모두 모욕하고 무시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왕은 군대를 보냅니다. 그래서 그렇게 반응한 사람들을 모두 징벌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립니다. 


이런 왕이 정말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일들이 현실 세계에서 정말로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선 현실 세계의 왕은 이렇게 자기 백성들에게 친절하지 않을 뿐더러 그래서 백성들도 왕이 잔치를 벌여 놓고 초청하면 만사 재쳐놓고 참석하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실 현실 그대로를 옮겨 놓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 속의 왕은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유 속에 나오는 잔치에 초청받았던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냥 좋기만 한 동네 할아버지로 생각한다는 것과 하늘나라를 정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만만한 곳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안 그렇습니다. 말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별로 존중하지 않고 또한 하늘나라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무엇이 증거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별로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잔치에 가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생각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자식이 그 부모를 존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하늘나라보다 현실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잔치에 초청을 받고서도 자기 밭으로 가고 또 사업을 하러 간 사람처럼 말입니다. 사실 이 두 사람들은 왕을 무시한 것도 아니고 왕의 말을 대놓고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같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왕이 특별하게 준비한 왕의 아들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도 잠시 농사를 돌보고 돈을 버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왕의 종들이 다시 와서 그렇게 잔치에 참여하라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을 하러, 돈을 벌러 나갔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지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아무리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적인 이익과 부딛힐 때는 주저 없이 현실을 택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처럼 왕의 왕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서 그 왕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왕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무시할 만큼 왕과 그 왕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왕은 왕의 초청을 적극적으로 무시하고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과 현실적인 이유로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진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현실과 왕 대신 자기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했던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마을’과 함께 진멸되고 말았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이런 일이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보다 나라의 독립과 영광이라는 현실을 더 중하게 여겼습니다.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보려고 바둥거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대신 보내신 군대인 로마에게 패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을 징벌한 왕은 그 다음에 다시 다른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이번에는 그럴 듯한 사람들, 그러니까 지도자들이나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런 구별 없이 정말 아무나 초청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잔치가 벌어지는 왕궁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왕궁까지 왔던 사람들 모두가 다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한 사람은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데로 내쫓겼고 거기서 슬퍼하면서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바깥 어두운데’는 항상 하늘나라 바깥과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니 우리는 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너무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등장인물은 바로 예복을 입지 않고 왔기 때문에 초청을 받아들였다가 바깥으로 내쫓겼던 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초청 자체를 거부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이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소수가 될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되면 결국 그 운명이 앞서 멸망당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복입니다. 이 예복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그리고 그 예복을 입지 않으면 결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복이 무엇일까요? 이 예복이 무엇이길래 초청에 반응해서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까지 왔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쫓겨나야만 할까요? 그것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덧입혀 지는 그리스도의 의’로 해석되었는데요. 이것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구속사역이 끝난 상태에서 과거를 되돌아 보며 생각하는 것이고, 이 말의 의미를 원래의 의미에 가장 가깝게 표현해 본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과 또 반대로 우리가 그런 영원한 복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 긍정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즐거움과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구원 뿐만이 아닙니다. 실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내 삶의 현실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아무리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고 탐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면 안됩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렇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그렇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 우리는 택함을 받는다는 말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결국 누가 택함을 받은 자들이 됩니까?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예복을 준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결국 초청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됩니다. 초청을 받아들이고 또 그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을 준비한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들, 그러니까 하늘나라 잔치의 영원한 기쁨과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초청도 받아들이고 또 예복도 준비하게 될까요? 그런 사람들은 그 초청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며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고 또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혜인지를 알면서 은혜에 의지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예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택함을 받은 적은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 또한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게는 이런 마음과 태도, 그리고 삶의 모습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열매라고 말하든 아니면 증거라고 말하든 이런 모습들은 꼭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사람은 청함을 받은 사람에 비해서는 정말 적은 수가 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주고 싶어하셨던 그 나라를 받아들일 사람이 그렇게 소수가 된다는 것이 그 분께는 얼마나 속이 상하고 슬픈 일이었겠습니까? 


사순절을 지내면서 택함을 입은 자가 아무리 적은 수가 되더라도 나는 꼭 그들 중에 포함되기로 작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로 들어가는 은혜를 꼭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