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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12.20. 주일오전 - 내 백성을 위로하라(대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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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이사야 40:1-11절





예전에 제가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다룬 영화 한 편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기 전에는, 물론 그것이 미국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어느 곳을 방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수행원들과 경호원들을 대동하게 일정에 맞추어 다녀오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것은 그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느 지역에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계획이 세워지고 나면 방문에 대한 통보가 이루어지고 그 때부터 그 방문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우선 그 지역의 시민들과 관공서, 또 대통령이 만나야할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실례나 실수가 없도록, 또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정말 치밀하게 모든 준비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쪽에서 이런 준비를 하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또 다른 준비가 이루어 집니다. 그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경호실 직원들과 그 지역의 경찰들입니다. 대통령이 지나갈 모든 길 옆과 그 길이 보이는 모든 건물들을 직접 체크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건물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저격범이 숨기 쉬운 곳은 없는지 일일히 살펴 보고 위험한 곳이 있으면 봉쇄합니다. 당일에도 대통령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지역에는 곳곳에 경호원과 경찰들이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합니다. 그 덕분에 대통령은 방문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이 말씀이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이 현실이 되어 있는 미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나중에 나라가 망해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유다백성들과 패망한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게 될 유다 백성들을 향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할 것이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40장부터는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너희들의 왕으로서 이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포로가 된 너희를 구원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겠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가시기 전에 미리 전령을 보내시면서 왕의 행차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전령들에게 주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망한 나라의 백성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가 있고 또 본토에서 노예처럼 노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소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귀향과 나라의 회복에 대한 소식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공교롭게 이런 두 가지의 복된 소식을 동시에 듣는 경험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일왕이 미국에 항복하는 음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패망한 것입니다. 일본에 끌려간 동포들에게는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 가장 기뻤을 것이고, 본토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게는 이제 해방되어 다시 어엿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기뻤을 것입니다. 전령들이 바로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졌고 그 소식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 동안 이스라엘은 거듭되는 반역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자리로 갔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요. 그러나, 이제 전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버리고 그래서 너희와 원수되었던 하나님께서 너희 하나님으로 너희를 찾아와 너희를 해방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비록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동안 얼마나 들어보고 싶었던 하나님의 이름이고, 또 불러보고 싶었던 하나님의 이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름으로 전령을 보내셨고, 그들에게 첫번째로 맡기신 역할은 그런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위로의 메세지는 이제는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악의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충분히 벌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바벨론에게 고통당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로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이 전령들에게 맡겨진 첫번째 임무였습니다. 


두번째로 전령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바로 왕이 백성들을 구하러 갈 ‘왕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광야에 준비될 것입니다. 사막에 다시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잡혀갔던 그 길을 따라서 다시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가 있어도, 아무리 높은 산이 있어도, 그리고 고르지 않고 험한 곳이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결국 그 모든 곳은 평탄한 왕의 대로가 될 것이고 왕이신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러 가시며 또 그 길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여호와의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잡혀 갔던 그 길에서 개선행진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망한 나라의 남겨진 백성들, 특히 포로로 잡혀가 있는 백성들이 이런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쉬운 일일까요? 지금 눈에는 아무 조짐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아마도 이 야속을 믿는 것은 일본이 한참 위세를 떨치고 있을 1940년에 일본이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믿는 일만큼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령에게 특별한 세번째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전령의 입에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그 말씀을 담아 주셨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영원한 것은 ‘육체’ 그러니까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두려워 하고 있는 바벨론 사람들이 아니지요.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풀 같은 육체와 그 육체의 아름다움을 피게도 하고 지게도 합니다. 비록 그들이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지 않았고 또 순종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그 사실을 붙들 수 있다면 지금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 영원히 서 있고 또 서 있을 그 말씀을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말이지요.


하나님이 전령들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령들의 입술에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나라에 대한 설명을 담아 주었습니다. 읽기만 해도 가슴 벅차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말씀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다스리시는 것을 소망하고 또 기대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다스림은 온전히 의로운 다스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를 가장 많이 갈등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며 절망하게 하는 것, 그리고 가장 큰 시험거리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의로 통치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롭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의로운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상 받아야 할 사람이 벌을 받고 벌 받아야 할 사람이 호의호식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벌이지고 있습니다.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 일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그래도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며 때로는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시릴 나라는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곳은 완전한 의로 다스리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그 분의 전능하신 팔로 의의 통치를 펼치는 그런 나라입니다. 또 한 가지 그 나라는 이전에 일그러져 있던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바로 잡는 그런 곳이 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켜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 애쓰고 힘썼던 사람들에게는 상급이 주어지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의롭고 강직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전과 보호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이 보장된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11절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해 주신 인도와 보호는 얼마나 세심한지 모릅니다. 그냥 뭉뚱그려서 돌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어린 양은 팔로 안고, 젖먹이는 어미들은 부드럽게 하나 하나 가장 세심하고 완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넘치는 소식은 깊은 불순종으로 이제 곧 완전히 망해버릴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무지랭이 같은 삶을 살게 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앞으로 그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되더라도 붙들고 살아가라고, 다시 떠올리고 다시 생각하면서 소망을 잃지 말라고 주신 그런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약속을 역사 속에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 모든 사람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가 되어 고역에 시달렸던 것처럼,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사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품삯을 받으며 죄의 사슬에 묶여 사탄 밑에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같은 영혼의 절망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나는 너희의 왕, 너희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 영혼을 깨우시고 위로하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이미 너희의 죄 값을 다 치러 놓았으니 이제 그 노역에서 벗어나라고, 이제 내가 주는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그 죄를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광야같고 사막같은 너희의 삶과 영혼 속에 내가 너희를 구원하러 들어갈 그  길만 준비해 놓는다면, 내가 너희를 해방하고 구원해 주겠다고, 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해 주시겠다고 영원한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정말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 홀로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아들을 십자가 보좌 위에 왕으로 앉히시고 그 분의 생명을 우리 죄값으로 치르시며, 그 분의 고난으로 우리의 고역을 대신하셔서 그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멸망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때처럼 하나님 홀로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 주셨고, 그 영원한 말씀을 영원히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자유가 있고, 우리 삶에 풍성함이 있으며, 정죄함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구원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며, 강하신 왕이 이미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자유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 세상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주님과 우리가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완전히 정의로운 다스리심 속에서 그 분의 완벽한 인도와 붙들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끊임 없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고 또한 끊임 없이 사람에게 소망을 두려고 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지와 편견이 깨어지고 또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기술이 발전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풍족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어우러져 낙원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어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발전되어져 왔습니까? 아닙니다. 한 때는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과 소망이 가장 강해진 때, 두 번의 세계전쟁이 벌어져 인간은 스스로 얼마나 악하고 잔인한 존재인지, 얼마나 이기적이고 또 약한 존재이며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를 증명해 보이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동안은 또 다시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온 듯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다시 인간 자체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지요. 기술은 정말 혁신적으로 발전했고, 경제는 세계화라는 표어 아래서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풍요로워진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세월이 채 30년도 되기 전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혼란하고 불안한 시대, 그리고 잔인함과 불합리와 탐욕이 판을 치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상위 1퍼센트의 사람이 전세계 부의 40퍼센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10퍼센트의 사람들이 85퍼센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나머지 15퍼센트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빈부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지고 있고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처럼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상위 10퍼센트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45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불균형이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금수저다 은수저다 심지어는 흙수저다 하는 이야기까지 등장하게 되었지요. 


또한 일부 이슬람교도들은 일그러진 신앙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나머지 국가들은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체의 일부를 절단당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현재도 매년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런 대명천지에 기독교 신앙 때문에 순겨를 당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심하지는 않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는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정상적이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신앙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는 일, 믿음을 따라 생활하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불편하면 안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하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믿음을 드러내고 또 그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대로 따라 살아가는 일,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양심을 따라 사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려면 크고 작은 손해를 각오해야 하며 오해받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되는 무시와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게 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그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아픔을 그냥 보아 넘기기가 힘들어 집니다. 이렇게 저렇게 일그러져 가는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상처를 받고 아픔을 당하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되니까요. 게다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그런 일들을 보면서 그런 일들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마저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르지 못한 믿음이,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세상이 겪고있는 아픔과 뒤틀림의 원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고통과 부패, 그리고 그 안에 살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아픔이 과연 우리 살아생전에 완전히 끝나고 완전히 해결되는 날이 올까요?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지만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완전히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살면 모를까, 불의한 이 세상을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는 일은 우리에게 언제나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로 살아가야 하는 나 개인에게 짊어진 짐 때문에도 그렇지만 아파하고 힘겨워 하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좌절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무너져도 여전히 가질 수 있는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목이 마를 수록 더 간절하게 물을 찾는 법입니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그 세상의 아픔을 보며, 또 믿음 때문에 양심 때문에 손해와 고통을 당하는 그런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완전한 의와 진리로 다스리실 하나님 나라의 완전함을 바라보고 소망하라고, 그 소망을 더 크고 간절하게 가지라고, 거기서 참된 위로를 발견하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도 상급과 보응은 있습니다. 잘 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받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히 의롭지 않습니다. 형편 없이 불의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상주고 벌 주는 일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다스리실 그 나라, 이미 주님이 이 땅에 가지고 오신 그 나라가 완전히 이 세상에 임할 때, 그 때 주님은 상 주실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보응하실 자에게는 보응하실 텐데 그 상급과 보응은 완전히 의로워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기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불공평함, 이 세상의 불의함 때문에 마음이 상해 계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완전히 의로운 보응과 상급이 있을 그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될 그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소망으로 절망과 분노를 이겨내시고 그래도 이 땅의 정의와 공평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 이 땅의 불완전함과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삶에는 분명한 상급이 있습니다. 영원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지금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은혜가 주는 위로는 결코 완전하거나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파하고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다리는 그 날, 우리가 소망하는 그 나라가 오면은 주님께서 우리는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경험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전부를 가장 만족하게 먹여주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살아갔던 성도들은 어린 양은 그 강한 팔로 품에 안아 돌보시고, 젖먹이는 암컷들은 부드럽게 인도하시듯이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딱 맞는 완전한 은혜 속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 성도로 사는 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 위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도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주님의 눈으로 불의하고 불완전한 세상과 그 안에서 고통하는 사람들을 보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 애통함과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강한 팔로 임하시고 그 팔로 온 세상을 다스리실 그 날, 상급과 보응이 있는 그 날, 우리 주님께서 목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느라고 참 쉼을 얻지 못했던 우리들을 온전히 돌보시고 영원히 인도하실 그 날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위로 없는 세상에서도 참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신 이 계절에, 우리 마음에 그 아들이 다시 오실 그 날과 그 분의 다스리심을 소망하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소망으로 지치고 목마른 우리의 영혼에 참 위로를 허락해 주셔서 또 다시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