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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22. 새벽예배 -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창세기 87)



창2501to11 -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창8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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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5장 1-11절



창세기 2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이제 아브라함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이삭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성경이 들려주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이야기 두 개는 그의 남긴 훌륭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도, 그가 신앙인으로서 남긴 훌륭한 신앙의 유산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또 첩을 얻어서 그 첩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명단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저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례식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별로 내세울 것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가 보면 이 마지막 두 개의 이야기 속에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그 이야기들 자체는 그저 그 당시의 그저 평범한 한 남자의 인생과 마지막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브라함 또한 이 땅을 살다간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이었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으로 할례를 행한 사람입니다. 어떤 쪽에서 생각하든 자칫하면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만드신 하나님 보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고 마치 아브라함이 훌륭해서 아브라함이 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 자체가 일그러질 수 있기 때문에, 은혜는 사라지고 율법만 남고, 하나님은 사라지고 사람만 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기록을 이런 식으로 남기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첩인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나온 자녀들 중에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될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두라 이야기가 기록된 점도 있지만, 사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 때문에 그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도 또 다시 그두라를 첩으로 맞아들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나중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맞아들인 첩의 자식들의 후손이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는 그가 한계가 뚜렷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으며 결국 아브라함도 유구하게 흘러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다가 부르시면 갈 수 밖에 없는 피조된 인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한 일이 많아도, 세운 업적이 훌륭해 보여도 인간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하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단해 보이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그 모든 사람들은 결국 흠이 많고 코끝을 드나드는 숨 하나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피조물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항상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냉정하고 허무하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항상 부패되기 쉽고 잘못된 길로 가기 쉬운 상대방과 나 자신을 한꺼번에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찬사를 보내면 나 또한 그 사람의 겉모습만을 닮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사람의 칭찬을 사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어떤 사람의 겉모습과 그 사람이 남긴 업적의 크기만 가지고 그 사람을 높이게 될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교만해지고 하나님 보다 실제로 자신을 더 높이게 되기가 쉽습니다. 이런 일들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업적을 보고 다른 사람을 높이면서 그 사람을 따라가려고 애쓰고, 또 그렇게 높여진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지게 되고…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땅에 교회 안에서는 서로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느라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비극이 너무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칭찬을 할 때도, 비난을 할 때도 그래야 합니다. 상대방도 나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 한계가 뚜렷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칭찬 때문에 망가지고 반대로 실망 때문에 무너지는 일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아브라함이 첩을 맞아 들인 일처럼 일 자체도 완전하지 않을 뿐더러 항상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나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너무 극단적으로 칭찬하거나 열광해서도 안되고 반대로 너무 극단적으로 비난하거나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은 인간으로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나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모두 다 그렇게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저 흠 많고 부족한 존재로,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면서 피조물로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8절과 9절을 보면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 구절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감동시키는 것은 성경이 아브라함의 장례를 지낸 것이 이삭 혼자가 아니라 이스마엘과 함께 였다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차라리 남만 못한 존재입니다. 아버지이기는 아버지인데, 재산 한푼 물려주지 않은 채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내쫓을 때 음식과 물조차 넉넉하게 챙겨주지 않았던 그야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만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의 부고를 듣고는 그래도 아들이라고 이삭과 힘을 합쳐서 아버지를 장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자신을 그렇게 박대한 아버지 아브라함을 용서했다는 뜻이고, 비록 아브라함은 자신을 그렇게 대했어도 그는 아브라함을 여전히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을 정성스레 장례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선대하든 혹은 우리를 박대하든 모두가 다 긍휼히 여겨야 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참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쉽지 않아도 모두가 다 그렇고 그런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랑의 출발점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과 정죄하는 마음이 약해지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니까요. 우리는 이삭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는 종의 아들로 태어났고 장남이면서도 장남으로 누려야 할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는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부작용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항상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한계투성이 존재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게 나 자신이든 남이든 사람을 우상처럼 높이거나 지나치게 경멸하게 되는 것을 피하시고 또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살면서 하나님 앞에 갈 준비를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과도함이 만들어 내는 이런 저런 어려움과 상처를 줄여나가며 하늘에서 누릴 영광을 늘릴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항상 이 지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또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